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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라는 이름의 타임캡슐 ‘드라마 눈이 부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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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과거로 돌아간다면 당장 봐야 할 작품 제55회 백상예술대상 TV 부문 대상 수상작

[KAVE=이태림 기자]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는 첫 장면부터 예사롭지 않다. 치매를 앓는 할머니 김혜자(김혜자)가 손녀 혜지(한지민)에게 "나 스물다섯 살이야"라고 말하는 순간, 시간은 2019년에서 1970년대로 순식간에 역행한다. 마치 '인터스텔라'의 블랙홀을 통과하듯, 우리는 할머니의 기억 속 세계로 빨려 들어간다. 다만 우주선이 아니라 치매라는 시간 왜곡 장치를 타고서.

그곳에서 만나는 건 스물다섯 살 김혜자(한지민 1인 2역). 1970년대 시골 마을, 그녀는 동네 청년 남우철(남주혁)과 결혼해 평범한 신혼 생활을 시작한다. TV 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가난하지만 행복한" 클리셰가 아니다. 실제로는 정말 가난하고, 끼니 걱정을 해야 하며, 남편은 사업에 실패하고,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구박한다. '응답하라 1988'의 향수 어린 골목길이 아니라, '국제시장'의 고단한 생존기에 가깝다.

하지만 혜자는 무너지지 않는다. 남편이 사업 실패로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에도, 시어머니가 "아들 하나 못 낳느냐"며 쏘아붙이는 날에도, 그녀는 꿋꿋하게 버틴다. 어느 날은 가게 장사로, 어느 날은 미싱 일로, 어느 날은 단칸방에서 식당을 차려 생계를 이어간다. 남편 우철은 그런 아내를 바라보며 미안해하면서도, 또 다른 사업 아이템을 들고 와 "이번엔 다르다"고 말한다.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가 과거의 데이지를 잡으려 했다면, 우철은 미래의 성공을 잡으려 평생을 달린다.

세월이 흐르며 두 사람에게는 아이들이 생기고, 그 아이들이 자라 학교에 가고, 가족은 조금씩 늘어난다. 1970년대가 1980년대가 되고, 1980년대가 1990년대가 된다. 혜자의 얼굴에는 주름이 생기고, 우철의 머리는 희끗희끗해진다. 하지만 드라마는 이 시간의 흐름을 '포레스트 검프'처럼 역사적 사건들로 포장하지 않는다. 대신 "딸이 처음 걸음마를 뗀 날", "아들이 대학에 붙은 날", "손자가 태어난 날" 같은 개인의 이정표로 시간을 측정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화면은 다시 2019년으로 돌아온다. 할머니 혜자는 치매 증상이 점점 심해져 가족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한다. 손녀 혜지는 할머니의 기억 속을 탐험하며, 자신이 몰랐던 할머니의 젊은 시절을 발견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지금 자신 앞에 앉아 있는 이 노인이, 한때는 자신과 똑같은 스물다섯 살이었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꿈꾸고 좌절했던 한 명의 여자였다는 사실을.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이 과거로 여행하며 깨달음을 얻듯, 혜지도 할머니의 과거를 통해 현재를 다시 보게 된다.

드라마의 구조는 치매를 앓는 할머니의 현재와, 그녀의 기억 속 과거가 교차 편집된다. 할머니가 "우철이 어디 갔어?"라고 묻는 장면 다음에는, 젊은 혜자와 우철이 첫 데이트를 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할머니가 손녀의 얼굴을 보며 "네가 누구니?"라고 묻는 장면 다음에는, 젊은 혜자가 갓 태어난 딸을 안고 웃는 장면이 나온다. 이 편집은 단순한 플래시백이 아니라, 치매 환자가 경험하는 시간의 뒤섞임을 시각화한 것이다. '메멘토'가 단기 기억상실증을 역순 편집으로 표현했다면, '눈이 부시게'는 치매를 시간의 무작위 재생으로 표현한다.

할머니의 기억 속으로 떠나는 여행

'눈이 부시게'의 작품성은 무엇보다 '평범한 인생'을 다루는 태도에서 빛난다. 이 드라마에는 재벌 상속자도, 천재 의사도, 비밀 요원도 없다. 혜자와 우철은 그저 평범한 부부다. 크게 성공하지도, 완전히 실패하지도 않는다. 가끔 행복하고, 자주 힘들고, 대부분은 그냥 살아간다. '기생충'이 계급의 극단을 보여줬다면, '눈이 부시게'는 중간 어딘가에서 평생을 보낸 사람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이 평범함이 오히려 더 보편적인 울림을 만든다. 시청자 대부분의 부모님, 조부모님이 바로 이런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거창한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자식을 키우고 손주를 봤다. 집 한 채 마련하는 데 평생이 걸렸지만, 그래도 명절이면 온 가족이 모였다. '라라랜드'의 세바스찬과 미아처럼 꿈과 사랑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꿈도 사랑도 생계도 가족도 다 포기할 수 없어서 전부 끌어안고 버티며 살아온 것이다.

김혜자의 연기는 이 평범함에 존엄을 부여한다. 그녀가 연기하는 할머니 혜자는 '디어 마이 프렌즈'의 노년들처럼 당당하지도, '수상한 그녀'의 오말순처럼 유쾌하지도 않다. 그냥 늙고, 아프고, 기억을 잃어간다. 가족에게 짐이 되는 게 미안하면서도, 동시에 섭섭하다. 화장실 가는 것도 도움이 필요하고, 밥 먹다가 흘리고, 아들 이름도 잊어버린다. 이 처절한 현실성이 드라마를 더욱 아프게 만든다.

한지민의 1인 2역은 이 드라마의 또 다른 축이다. 스물다섯 살의 젊은 혜자는 '청춘시대'의 스물대처럼 패기 넘치지 않다. 이미 결혼했고, 생계 걱정을 하고, 시댁 눈치를 본다. 하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꿈이 있고, 욕심이 있고, 자존심이 있다. 한지민은 이 복잡한 층위를 섬세하게 연기한다. 같은 배우가 할머니 역을 맡은 김혜자와 교차 편집되면서, 시청자는 자연스럽게 "저 젊은 여자가 저 할머니가 된다"는 시간의 흐름을 체감하게 된다.

남주혁의 우철은 전형적인 '무능한 남편' 클리셰를 벗어난다. 그는 사업에 계속 실패하지만, 동시에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돈을 벌어오지 못해 미안해하면서도, 꿈을 포기하지 못한다. 가부장적 시대에 태어났지만, 아내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 복잡한 캐릭터는 '악당'도 '영웅'도 아닌, 그냥 '사람'이다. 우리 아버지, 우리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당신이 당신을 잃게 된 순간, 찾아온 마법

드라마는 또한 치매를 다루는 방식에서도 정직하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처럼 로맨틱하게 포장하지 않는다. 치매는 아름답지 않다. 환자도 힘들고, 가족도 힘들다. 사랑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경제적 부담, 신체적 피로, 정서적 고갈이 모두 리얼하게 그려진다. '스틸 앨리스'가 초기 치매 환자의 내면을 지적으로 탐구했다면, '눈이 부시게'는 말기 치매 환자를 돌보는 가족의 현실을 정서적으로 담아낸다.

'눈이 부시게'를 보다 보면, 지금 내 앞에 앉아 잔소리하는 그 노인이 한때는 나와 같은 나이었고, 나와 똑같이 불안해하고 꿈꿨던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그리고 언젠가 나도 저렇게 늙고, 기억을 잃고, 누군가에게 짐이 되리라는 사실도 함께 받아들이게 된다. 이건 위로가 아니라 각성이다. '인터스텔라'에서 쿠퍼가 딸의 방에서 시간의 본질을 깨달았듯, 우리는 할머니의 기억 속에서 시간의 잔혹함과 소중함을 동시에 깨닫는다.

또한 지금 스물대, 서른대를 살며 "내 인생이 이대로 괜찮은가" 고민하는 사람에게도 이 드라마는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 혜자의 인생은 성공한 인생이 아니다. 하지만 실패한 인생도 아니다. 그냥 살아낸 인생이다. '위플래쉬'나 '라라랜드'처럼 "꿈을 이루지 못하면 의미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꿈을 이루지 못해도, 인생은 계속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계속되는 인생' 속에도 빛나는 순간들이 있다고,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장면들이 있다고 속삭인다. 평범함에 대한 이 애정 어린 시선이, 오늘도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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