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대신 지하로"… 세계가 주목한 한국의 '번아웃'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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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남
By 박수남 편집장

따뜻한 위로 대신 처절한 생존… 전예진·김유나가 그린 '다크 힐링'의 세계

"편의점 대신 지하로"… 세계가 주목한 한국의
"편의점 대신 지하로"… 세계가 주목한 한국의 '번아웃' 문학 [Magazine Kave=박수남 기자]

세계는 지금 한국의 '피로'에 주목하고 있다. 화려한 K-팝의 네온사인과 역동적인 K-드라마의 서사 이면에서, 조용히 그러나 거대하게 끓어오르는 하나의 정동(affect), 바로 '번아웃(Burnout)'이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가 "K-팝의 볼륨을 줄이고 K-힐링에 주목하라"고 타전했을 때, 그들은 단순히 한국의 베스트셀러 트렌드를 보도한 것이 아니다. 현대 자본주의의 최전선인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집단적 무기력과 그 안에서 피어나는 기이한 문학적 대응을 목격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K-힐링' 소설들이 편의점, 서점, 세탁소를 배경으로 따뜻한 위로와 소박한 연대를 통해 독자에게 '잠시 멈춤'을 권했다면, 전예진과 김유나는 그 멈춤의 장소를 지상이 아닌 '지하'와 '내면의 심연'으로 옮겨놓는다. 이들의 세계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다. 생존을 위한 처절한 굴 파기이자, 무너진 신뢰 위에서 진실의 잔해를 줍는 고고학적 작업이다. 전예진의 장편소설 『매점 지하 대피자들』과 김유나의 소설집 『믿을 수 있을 만큼의 진실』을 중심으로, 한국 사회의 병리적 현상인 '피로'가 어떻게 문학적 자산으로 전환되었는지, 왜 이 텍스트들이 글로벌 독자들에게 필연적인 공명을 일으키는지 파헤친다.

현대 한국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재독 철학자 한병철이 진단한 '피로사회(The Burnout Society)'의 렌즈가 필수적이다. 21세기는 규율과 금지의 시대를 지나 "할 수 있다(Can)"라는 긍정성이 지배하는 성과 사회다. 이곳에서 개인은 타인에 의해 착취당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착취하는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된다. 전예진과 김유나의 소설 속 인물들은 이 '할 수 있음'의 감옥에서 탈출한 탈주자들이다. 그들은 "아무 말도 듣지 않고 누워 지내고 싶다"고 선언하며 사회적 연결을 끊고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이는 패배가 아닌, 한병철이 말한 "사색적 중단"을 회복하기 위한 가장 과격하고도 소극적인 저항이다. 서구의 독자들은 한국 문학 속 인물들이 겪는 고립과 피로에서 자신들의 미래 혹은 현재를 본다. 펭귄 랜덤 하우스 등 거대 출판사들이 한국 문학에 러브콜을 보내는 것은 단순한 이국적 취향(Exoticism)이 아닌 동시대적 고통의 공유(Synchronized Suffering)에 기반한다.

201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전예진은 '현실의 비루함을 환상의 문법으로 도약시키는' 독보적인 능력을 보여준다. 등단작부터 자영업의 위기와 청년 세대의 갈 곳 없음을 예리하게 포착했던 그의 문체는 감정을 과잉 소비하지 않으면서도 독자의 폐부를 찌르는 서늘한 유머를 구사한다. 전예진에게 환상은 도피처가 아닌 현실을 더 또렷하게 보여주는 확대경이다. 그의 첫 장편소설 『매점 지하 대피자들』은 번아웃에 빠진 청년 '선우'가 깊은 산속 '고라니 매점'을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제목과 배경에 등장하는 '고라니'는 한국 사회에서 상징적인 존재다. 멸종 위기종이지만 한국에서는 유해 조수로 지정될 만큼 흔하며, 로드킬의 대명사로 불린다. 전예진은 이 '고라니'를 전면에 내세워 보호받지 못하고 도로 위에서 객사할 운명에 처한 청년 세대의 자화상을 그린다. 선우가 찾아간 '고라니 매점'은 사회라는 고속도로에서 튕겨 나온 잉여들의 집결지다. 매점 지하의 '굴 호텔' 투숙객들은 돈을 내고 침대를 배정받는 대신, 헤드랜턴과 야전삽을 지급받아 직접 땅을 파 자신의 방을 만들어야 한다.

"여긴 멀쩡한 사람이 없네요. 인생 망한 사람만 모인 곳이네." "왜 그렇게 얘기해요. 나만 망했지, 다 잘 지내다 나가기로 했잖아요."

굴 호텔에는 알코올 중독자, 실패한 사업가 등 상처 입은 이들이 모여 서로 간섭하지 않는 '느슨한 연대'를 형성한다. 전예진은 이를 통해 현대인이 갈망하는 관계의 본질을 묻는다. 우리는 완전히 고립되기를 원하면서도, 동시에 누군가가 곁에 있기를 바란다. "연락이라도 하고 지냅시다"라는 마지막 대사는 완전한 단절이 불가능함을, 그리고 상처 입은 자들이 서로에게 건넬 수 있는 최소한의 부표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전예진이 공간을 통해 사회를 해부한다면, 김유나는 인간 내면의 미세한 균열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본다. 2020년 등단한 김유나의 첫 소설집 『믿을 수 있을 만큼의 진실』은 제목부터가 현대 사회의 불확실성을 역설적으로 대변한다. 우리는 진실조차도 '믿을 수 있을 만큼'만 선별적으로 수용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김유나의 인물들은 악인이 아니다. 삶이 버거워질수록 스스로를 조금씩 속이며 버티는 소시민들이다. 작가는 인물들이 쌓아 올린 작은 거짓말들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 드러나는 '진실의 민낯'을 덤덤하게 포착한다.

"주제와 소재의 무게를 너끈히 감당해 장편 작가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 김성중 소설가

최근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을 거둔 한국 소설들이 '안전한 공간'과 '쉬운 해결'을 제공하는 '코지 힐링(Cozy Healing)'이라면, 전예진과 김유나의 작품은 '다크 힐링(Dark Healing)' 혹은 '리얼리즘적 번아웃 문학'이다.

  • 공간의 차이: 햇살 드는 서점 대신, 습하고 어두운 지하 굴이나 붕괴된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 해결의 방식: 마법 같은 치유 대신,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묵묵히 견디는 과정을 보여준다.

  • 독자 경험: 즉각적인 위로보다는, 책을 덮고 난 후 긴 여운과 성찰을 남긴다.

영미권 출판계는 이미 이 '어두운' 한국 문학의 잠재력을 감지하고 있다. 펭귄 랜덤 하우스의 편집자 제인 로슨은 "한국 소설은 갑작스러운 거대 트렌드가 되었다"고 언급했다. 전예진과 김유나의 소설은 기존 힐링 소설에 만족하지 못하는, 더 깊은 문학적 성취와 사회 비판적 시각을 원하는 글로벌 독자층을 공략할 강력한 콘텐츠다. 'K-번아웃'은 이제 보편적인 인간 조건(Human Condition)이 되었으며, 이에 대한 한국 작가들의 해법은 전 세계 독자들에게 유효한 철학적 가이드를 제공한다.

전예진의 『매점 지하 대피자들』과 김유나의 『믿을 수 있을 만큼의 진실』은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어디로 도망치고 있는가?" 그리고 "그 도망의 끝에서 마주한 당신의 모습은 진실한가?" 이 두 작가는 한국 문학이 도달한 새로운 성숙의 징표다. 그들은 섣불리 희망을 노래하지 않는다. 대신 절망의 바닥을 샅샅이 훑고, 그 바닥에서만 주울 수 있는 작은 조약돌 같은 위로를 건넨다.

  • 전예진은 '자기만의 굴'을 팔 용기를 준다. 그 굴은 세상으로부터의 단절이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선이다.

  • 김유나는 '불완전한 진실'을 견딜 힘을 준다. 완벽하지 않아도, 조금은 비겁해도, 그것이 인간임을 인정하는 데서 오는 안도감이다.

고라니처럼 위태롭게 도로 위를 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이들의 소설은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를 수 있는 '갓길'이자 '지하 벙커'가 되어줄 것이다. 지금, 한국 문학은 지하로 내려가고 있다. 가장 깊은 곳에서 가장 보편적인 빛을 길어 올리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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