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의 영원한 페르소나, 안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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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남
By 박수남 편집장

[K-STAR 7] 한국 영화의 영원한 페르소나, 안성기 [Magazine Kave=Park Su-nam]
[K-STAR 7] 한국 영화의 영원한 페르소나, 안성기 [Magazine Kave=Park Su-nam]

2026년 1월 5일 오전 9시, 한국 영화계는 가장 거대한 기둥 하나를 잃었다. '국민 배우'라는 수식어가 그 누구보다 자연스러웠던 배우 안성기가 향년 74세를 일기로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병원에서 영면했다. 그의 별세 소식은 단순한 한 유명인의 부고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 전쟁 이후 폐허 속에서 피어난 한국 영화의 역사 그 자체가 한 챕터를 마감했음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았다.  

차가운 겨울 바람이 불던 2025년 연말, 자택에서 쓰러진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2019년부터 시작된 혈액암과의 긴 투병, 한때 완치 판정을 받으며 다시 현장으로 복귀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던 그였기에 대중이 느끼는 상실감은 더욱 컸다. 그는 병상에서도 영화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으며, 의식이 희미해지는 순간까지도 시나리오를 읽으며 "시간이 약"이라며 복귀를 꿈꿨던 천생 배우였다.

해외 독자들에게 안성기라는 이름은 최근의 K-콘텐츠 붐을 이끄는 젊은 스타들에 비해 낯설 수 있다. 그러나 봉준호의 〈기생충〉이 오스카를 들어 올리고,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를 강타할 수 있었던 그 비옥한 토양을 다진 인물이 바로 안성기다. 그는 헐리우드의 그레고리 팩(Gregory Peck)과 같은 신사적인 품격, 톰 행크스(Tom Hanks)와 같은 대중적 친근함, 그리고 로버트 드 니로(Robert De Niro)와 같은 연기적 스펙트럼을 동시에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1950년대 아역 배우로 시작해 2020년대까지, 장장 7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한국 사회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관통했다. 군부 독재 시절의 검열, 민주화 운동의 열기,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을 통한 자국 영화 보호, 그리고 마침내 도래한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까지, 안성기는 그 모든 순간의 중심에 있었다.  

본 기사는 안성기라는 한 배우의 생애를 통해 한국 현대사와 영화사를 조망하고, 그가 남긴 유산이 현재와 미래의 영화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심층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안성기의 건강 이상설이 처음 대두된 것은 2020년경이었다. 2019년 혈액암 진단을 받은 그는 특유의 강인한 정신력으로 치료에 임했고, 2020년 완치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암은 집요했다. 6개월 만에 재발한 병마는 그를 괴롭혔으나, 그는 대중 앞에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했다. 가발을 쓰고, 부은 얼굴로 공식 석상에 나타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던 그의 모습은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렸다.  

그의 마지막 나날들은 비극적이었지만, 동시에 영화인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려는 사투였다. 2025년 12월 30일, 음식물이 기도에 걸려 심정지 상태로 병원에 이송된 후, 그는 엿새 동안 중환자실에서 생사의 갈림길에 섰다. 그리고 2026년 1월 5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그의 장례는 가족장을 넘어선 '영화인장(葬)'으로 치러졌다. 이는 한국 영화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운 인물에게만 허락되는 최고의 예우다. 신영균예술문화재단과 한국영화배우협회가 주관한 장례위원회는 한국 영화계의 거목들로 구성되었다.

장례식장은 눈물바다였다. 특히 고인과 〈투캅스〉, 〈라디오 스타〉 등 숱한 명작을 함께했던 배우 박중훈은 상주를 자처하며 조문객을 맞이했고, "선배님과 함께한 40년은 축복이었다. 이 슬픔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며 오열했다. 〈오징어 게임〉의 이정재, 정우성 등 세계적인 스타들도 침통한 표정으로 빈소를 지키며 대선배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로를 인정하여 문화예술인에게 수여되는 최고 영예인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이는 그가 단순한 연예인을 넘어, 한국 문화를 상징하는 인물이었음을 국가가 공인한 것이다.

안성기는 1952년 1월 1일,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대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안화영은 영화 제작자였으며, 이러한 가정 환경은 그가 자연스럽게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데뷔작은 1957년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5세였다. 전후 한국 사회는 빈곤과 혼란으로 가득 찼지만, 스크린 속의 꼬마 안성기는 대중에게 위로를 주는 존재였다. 특히 1960년 김기영 감독의 걸작 〈하녀〉에서 그는 어른들의 욕망과 광기 사이에서 희생되는 아이 역을 맡아, 아역이라고는 믿기 힘든 섬세한 연기를 선보였다. 이 시기 그는 약 7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천재 아역'으로 불렸다.

대부분의 아역 스타들이 겪는 비극—성인 연기자로의 전환 실패나 대중의 잊혀짐—을 안성기는 현명한 선택으로 극복했다. 고등학교 진학 무렵, 그는 과감하게 연기를 중단했다. 이는 당시 한국 영화계의 열악한 제작 환경과 겹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삶을 경험하지 않고는 좋은 배우가 될 수 없다"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그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에 진학했다. 베트남어과를 선택한 배경에는 당시 한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 중이던 시대적 상황이 깔려 있었다. 비록 1975년 베트남 공산화로 인해 전공을 살려 취업할 길은 막혔지만, 대학 시절의 학업과 연극 동아리 활동은 그에게 인문학적 소양을 길러주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학군장교(ROTC)로 임관하여 포병 장교로 복무했다. 이 시기 그는 철저히 일반인, 군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훗날 안성기의 연기에서 묻어나는 '소시민적 진정성'과 '단단한 생활감'은 바로 이 10년 가까운 공백기 동안 축적된 자산이었다. 그는 스타의 특권을 버리고 대중 속으로 들어갔기에, 다시 대중 앞에 섰을 때 그들의 얼굴을 가장 잘 대변할 수 있었다.

1980년대 한국은 정치적으로는 전두환 군사 독재의 암흑기였으나, 문화적으로는 새로운 기운이 꿈틀대던 시기였다. 안성기의 복귀는 이 '코리안 뉴웨이브'의 시작과 정확히 맞물렸다.

이장호 감독의 〈바람 불어 좋은 날〉은 안성기를 성인 연기자로 다시 각인시킨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그는 시골에서 상경하여 중국집 배달부, 이발소 보조 등을 전전하는 청년 '덕배'를 연기했다.  

  • 분석: 당시 한국 영화는 검열로 인해 현실 도피적인 멜로물이나 국책 영화가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안성기의 '덕배'는 억눌린 80년대 청춘의 초상을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그의 어눌한 말투와 순박한 표정은 독재 정권 하에서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하는 대중의 답답함을 대변했다.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에서 그는 파계승 지산과 대비되는 수행승 '법운' 역을 맡았다.  

  • 연기 변신: 그는 삭발을 감행하고 실제 승려처럼 생활하며 배역에 몰입했다. 그의 절제된 내면 연기는 베를린 국제영화제 등 해외 평단에서도 극찬을 받았다. 이는 한국 영화가 단순한 신파를 넘어 철학적 깊이를 담을 수 있음을 증명한 사례였다.

박광수 감독의 〈칠수와 만수〉는 80년대 한국 사회의 모순을 가장 날카롭게 포착한 작품 중 하나다.  

  • 줄거리와 함의: 안성기는 장기수(공산주의자) 아버지를 둔 탓에 사회적 연좌제에 묶여 꿈을 펼치지 못하는 간판장이 '만수'를 연기했다. 파트너인 '칠수'(박중훈)와 함께 고층 빌딩 옥상 광고탑 위에서 세상을 향해 소리치는 마지막 장면은 한국 영화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엔딩 중 하나로 꼽힌다.

  • 해외 독자를 위한 맥락: 1988년은 서울 올림픽이 열리며 한국이 '현대화된 국가'임을 세계에 과시하던 해였다. 그러나 영화는 화려한 올림픽의 이면에 가려진 노동 계급의 소외와 분단 국가의 비극을 꼬집었다. 옥상 위에서 농담처럼 던진 그들의 외침을 공권력은 '반정부 시위'로 오인하고 진압한다. 이는 소통이 부재했던 권위주의 사회에 대한 통렬한 블랙 코미디였다.

1990년대 민주화 이후 검열이 완화되고 대기업 자본이 영화계로 유입되면서 한국 영화는 르네상스를 맞이했다. 안성기는 이 시기 예술 영화와 상업 영화를 자유롭게 오가며 독보적인 위치를 점했다.

강우석 감독의 〈투캅스〉는 한국형 버디 무비의 시초이자 대흥행작이다.  

  • 캐릭터: 안성기는 부패하고 능글맞은 고참 형사 조 형사 역을 맡아, 원칙주의자인 신참 형사(박중훈)와 호흡을 맞췄다.

  • 의미: 기존의 진중하고 무거운 이미지를 벗어던진 그의 코믹 연기는 대중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이 영화의 성공으로 그는 '연기파 배우'를 넘어 '흥행 보증 수표'로 자리매김했다.

정지영 감독의 〈하얀 전쟁〉은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들의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다룬 최초의 한국 영화 중 하나다.  

  • 심층 분석: 베트남어과 출신이자 참전 세대인 그에게 이 영화는 각별했다. 그는 전쟁의 기억에 시달리는 소설가 한기주 역을 맡아, 전쟁이 개인의 영혼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처절하게 묘사했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 베트남 파병은 '경제 발전의 초석'으로 미화되는 경향이 강했으나, 안성기는 이 영화를 통해 전쟁의 참혹한 이면을 고발했다. 그는 이 작품으로 아시아태평양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국제적인 인정을 받았다.

2003년 개봉한 〈실미도〉는 한국 영화 역사상 최초로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천만 시대'를 열었다.  

  • 역사적 배경: 영화는 1968년 북한 침투를 목적으로 창설되었으나 남북 화해 분위기 속에 버려진 684부대(실미도 부대)의 비극적 실화를 다룬다.

  • 안성기의 역할: 그는 부대원들을 훈련시키지만 결국 국가의 명령에 따라 그들을 사살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 교육대장 최재현 준위 역을 맡았다. "날 쏘고 가라"는 그의 대사는 유행어가 될 정도로 회자되었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중년의 나이에도 여전히 흥행의 중심에 설 수 있음을 증명했다.

이준익 감독의 〈라디오 스타〉에서 그는 한물간 록스타 최곤(박중훈)의 곁을 묵묵히 지키는 매니저 박민수 역을 맡았다. 화려하지 않지만 깊은 울림을 주는 그의 연기는 "배우 안성기의 실제 인품이 가장 잘 드러난 배역"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안성기가 '국민 배우'로 존경받는 이유는 연기력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영화계의 권익 보호와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 미국과의 투자협정(BIT) 및 FTA 협상 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스크린쿼터(자국 영화 의무 상영 제도) 축소를 시도했다. 이에 맞서 영화인들은 격렬하게 저항했고, 그 선봉에는 항상 안성기가 있었다.  

  • 활동의 의미: 평소 온화하고 조용한 성품인 안성기가 머리띠를 두르고 거리 시위에 나선 모습은 대중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스크린쿼터는 밥그릇 싸움이 아니라 문화 주권의 문제"라고 설파했다.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공세 속에서 한국 영화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데에는, 안성기를 비롯한 영화인들의 이러한 처절한 투쟁이 있었음을 해외 독자들은 기억해야 한다.

2000년대 후반, 불법 다운로드로 인해 영화 부가 판권 시장이 붕괴 위기에 처하자, 그는 박중훈과 함께 '굿 다운로더 캠페인'을 주도했다. 그는 스타들을 섭외하여 노개런티로 홍보 영상을 찍고, 대중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콘텐츠를 즐기는 것이 문화를 살리는 길"임을 호소했다. 이 캠페인은 한국의 디지털 콘텐츠 소비 문화를 양지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안성기는 1993년부터 유니세프(UNICEF) 친선대사로 활동하며 30년 넘게 전 세계 빈곤 아동을 돕는 데 앞장섰다.  

  • 진정성: 단순한 홍보 대사가 아니었다. 그는 아프리카, 아시아의 분쟁 지역과 기근 현장을 직접 찾아 봉사활동을 펼쳤다. 유니세프 한국위원회는 그의 부고 소식에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든든한 희망의 기둥이었다"며 깊은 애도를 표했다.

그가 떠난 후, 온라인 커뮤니티와 소셜 미디어는 그에 대한 미담으로 도배되었다. 이는 그가 얼마나 훌륭한 인격자였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가장 화제가 된 일화는 그가 거주했던 서울 한남동의 고급 아파트 '한남더힐'에서의 이야기다. 한 네티즌의 증언에 따르면, 안성기는 매년 연말이면 아파트 관리 사무소 직원들, 경비원, 청소원들을 모두 호텔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했다.  

  • 상세 내용: 단순히 돈만 지불한 것이 아니었다. 안성기는 정장을, 그의 부인은 한복을 차려입고 직원들 한 명 한 명을 입구에서 맞이하며 감사를 표하고 기념사진을 찍어주었다고 한다. 이는 사회적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그의 평소 철학을 보여준다.

가수 바다는 안성기가 성당에서나 낚시터에서나 항상 자신을 따뜻하게 챙겨주었다며, "진정한 어른의 깊은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2PM의 옥택연은 영화 〈한산: 용의 출현〉 촬영 당시, 대선배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먼저 다가와 미소로 긴장을 풀어주던 모습을 잊지 못한다고 전했다. 그는 촬영장에서 자신의 분량이 없을 때도 자리를 뜨지 않고 스태프, 후배들과 함께하며 현장을 지키는 배우였다.

70년 가까운 연예계 생활 동안 안성기는 단 한 번의 스캔들이나 구설수에도 휘말리지 않았다. 철저한 자기 관리와 도덕성은 그를 '국민 배우'로 만든 가장 큰 힘이었다. 그는 CF 출연을 자제하며 이미지가 과소비되는 것을 경계했고, 정치권의 러브콜을 단호히 거절하며 오직 영화인의 길만을 걸었다.

안성기의 별세는 한국 영화계에 메울 수 없는 거대한 공백을 남겼다. 그는 단순한 배우가 아니었다. 그는 한국 영화가 걸어온 고난과 영광의 길을 함께 걸어온 동반자였고, 후배들에게는 나침반이었으며, 대중에게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였다.

해외 독자들에게 안성기는 한국 영화의 깊이와 넓이를 이해하는 열쇠와도 같다. 〈기생충〉의 송강호가 보여주는 페이소스, 〈올드보이〉 최민식의 에너지, 〈오징어 게임〉 이정재의 다양성 등 현재 세계를 매혹시키는 한국 배우들의 DNA 속에는 모두 안성기라는 유전자가 각인되어 있다.

그는 "나는 관객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그 약속을 지켰다. 화려한 스타의 자리에서 군림하기보다, 항상 낮은 곳에서 사람을 향한 연기를 펼쳤던 배우. 2026년 겨울, 우리는 그를 떠나보냈지만, 그가 남긴 180여 편의 영화와 그가 보여준 인간애는 영원히 스크린 안팎에서 빛날 것이다.

"굿바이, 국민 배우. 당신이 있어 한국 영화는 외롭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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