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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권력의 독점에서 인간의 해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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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독점과 소외된 민중의 절규/ 세종의 급진적 인본주의와 비밀 프로젝트/ 소리의 건축학, 훈민정음의 제 원리/ 이데올로기의 충돌, 사대부의 저항/ 언어의 암흑기, 그리고 민중의 힘/ 말모이, 빼앗긴 영혼을 되찾는 전쟁/ 디지털 시대, 한글의 재발견과 미래/

'한글'... "권력의 독점에서 인간의 해방으로" [KAVE=박수남 기자]

문자가 권력이던 시대의 어둠

15세기 조선, 문자는 곧 권력이었다. 한자(漢字)는 단순한 표기 수단을 넘어, 사대부(士大夫) 계급을 지탱하는 철옹성이었다. 어려운 한자를 익힌 자만이 과거에 급제하여 권력을 쥘 수 있었고, 복잡한 법률을 해석하여 타인을 지배할 수 있었다. 글을 모르는 백성은 억울한 일을 당해도 호소할 길이 없었고, 관청의 벽에 붙은 방(榜)이 자신의 생사를 가르는 내용일지라도 그저 까막눈으로 바라보며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지식은 나눔의 대상이 아니라, 철저한 독점과 배제의 도구였다.

지배층에게 지식의 보편화는 곧 기득권의 상실을 의미했다. 훗날 최만리를 비롯한 유학자들이 훈민정음 창제에 그토록 격렬히 반대했던 논리 이면에는, "어찌 천한 것들과 지식을 공유하겠는가"라는 오만함과, 자신들만의 성역이 침범당할지도 모른다는 근원적인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그들은 "중국을 섬기는(事大) 도리에 어긋난다"거나 "오랑캐의 짓"이라며 맹렬히 비판했지만, 그 본질은 계급 질서의 붕괴에 대한 공포였다. 글을 아는 백성은 더 이상 맹목적으로 복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두(吏讀)의 한계와 소통의 단절

물론 우리말을 표기하려는 시도가 전무했던 것은 아니다. 신라 시대부터 발달한 이두(吏讀)나 향찰, 구결 등은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적으려 했던 선조들의 고육지책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최만리의 상소문에서도 드러나듯, 이두는 "자연어를 한자로 기록하는 것이라 지역과 방언에 따라 표기가 달라지는" 한계가 명확했다.  

이두는 완전한 문자가 아니라, 한자라는 거대한 장벽을 넘어야만 접근할 수 있는 '반쪽짜리' 보조 수단에 불과했다. 이두를 익히기 위해서도 여전히 수천 자의 한자를 알아야 했기에, 일반 백성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이두는 행정 실무를 위한 딱딱한 문체였기에, 백성들의 생생한 삶과 감정,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노래와 탄식을 담아내기에는 그 그릇이 너무나 투박하고 비좁았다. 소통의 도구가 불완전하다는 것은 곧 사회적 관계의 단절을 의미했고, 백성의 목소리가 임금에게 닿지 못하는 '언로(言路)의 동맥경화'를 야기했다.

애민(愛民), 구호가 아닌 정책... 혁명적 복지 실험

우리가 세종을 '대왕'이라 칭송하는 것은 그가 단순히 영토를 넓히거나 화려한 궁궐을 지어서가 아니다. 역대 군주 중 세종만큼 철저하게 '사람'을 향해 있었던 지도자는 드물다. 그의 애민 정신은 추상적인 유교적 덕목이 아니라, 백성의 삶을 구체적으로 개선하려는 급진적인 사회 정책으로 발현되었다. 그중에서도 훈민정음 창제의 사상적 배경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노비 출산 휴가' 제도다.

당시 노비는 '말하는 짐승' 취급을 받으며 재산 목록에 오르던 시대였다. 그러나 세종의 시각은 달랐다. 1426년(세종 8년), 그는 관비(관청의 여종)가 아이를 낳으면 100일의 휴가를 주도록 명했다. 그러나 세종의 세심함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434년(세종 16년), 그는 "산모가 아이를 낳고 곧바로 복무하다가 미처 몸을 추스르지 못해 죽는 경우가 있다"며 출산 전 30일의 휴가를 추가로 부여했다. 총 130일의 휴가. 이는 현대 대한민국의 근로기준법이 보장하는 출산 휴가(90일)보다도 긴 파격적인 기간이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남편에 대한 배려였다. 세종은 산모를 돌볼 사람이 필요함을 인지하고, 남편인 관노에게도 30일의 휴가를 주어 아내를 간호하게 했다. 유럽이나 중국, 그 어느 문명권에서도 15세기에 노비의 남편에게 유급 출산 휴가를 주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세종이 노비를 단순한 노동력이 아닌, 천부적인 인권을 가진 '가정의 구성원'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훈민정음은 바로 이러한 사상의 연장선상에 있다. 노비에게 휴가를 주어 '생물학적 생명'을 지키게 했듯, 글자를 주어 그들의 '사회적 생명'을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17만 명에게 묻다... 조선 최초의 국민투표

세종의 소통 방식은 일방적인 하달(Top-down)이 아니었다. 그는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 백성의 뜻을 묻는 절차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토지 세법인 '공법(貢法)'을 제정할 때의 일화는 그의 민주적 리더십을 증명한다.

1430년(세종 12년), 호조에서 세법 개혁안을 내놓자 세종은 무려 5개월에 걸쳐 전국의 백성들에게 찬반을 묻는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관리부터 시골의 촌부까지, 총 17만 2,806명이 이 투표에 참여했다. 당시 조선 인구가 약 69만 명이었음을 감안하면, 성인 남성 대부분이 참여한 실질적인 '국민투표'였다. 결과는 찬성 98,657명(57.1%), 반대 74,149명(42.9%)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지역별 반응이었다. 비옥한 땅을 가진 경상도와 전라도에서는 찬성이 압도적이었으나, 땅이 척박한 평안도와 함길도에서는 반대가 많았다. 세종은 다수결로 밀어붙이지 않았다. 반대하는 지역의 사정을 헤아려, 토지의 비옥도와 그해의 풍흉에 따라 세금을 달리하는 합리적인 대안(전분6등법, 연분9등법)을 마련하는 데 수년을 더 투자했다. 이토록 백성의 목소리를 경청하던 군주에게, 그들의 목소리를 담을 '그릇'인 문자의 부재는 견딜 수 없는 모순이자 고통이었을 것이다.

깊은 밤의 고뇌, 친정(親政)의 비밀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 과정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실록에는 훈민정음 창제에 관한 논의 과정이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다가, 1443년 12월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으셨다"는 짧은 기록으로 갑작스럽게 등장한다. 이는 기득권 세력인 사대부의 반발을 예상하고, 집현전 학사들조차 모르게 왕과 왕실 가족들이 주도하여 은밀하게 연구를 진행했음을 시사한다. 세종 말년, 그는 심각한 안질(눈병)과 당뇨 합병증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그는 백성을 위한 글자를 만들기 위해 밤을 지새웠다. 훈민정음은 천재의 영감이 번뜩인 결과물이 아니라, 병든 왕이 자신의 생명을 깎아 만들어낸 헌신적인 투쟁의 산물이었다.

'한글'... "권력의 독점에서 인간의 해방으로" [KAVE=박수남 기자]

인체공학적 설계... 발음 기관을 본뜨다

훈민정음은 세계 문자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발음 기관 상형'의 원리로 만들어졌다. 대부분의 문자가 사물의 모양을 본뜨거나(상형문자), 기존 문자를 변형하여 만들어진 것과 달리, 한글은 소리가 만들어지는 인간의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분석하여 시각화한 '소리의 지도'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이 과학적 원리를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초성의 기본자 5자는 발음할 때의 구강 구조를 엑스레이 찍듯 그려냈다.

  • 아음(ㄱ):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 (군(君)의 첫소리). 이는 연구개음의 조음 위치를 정확히 포착한 것이다.  

  • 설음(ㄴ): 혀가 윗잇몸에 붙는 모양 (나(那)의 첫소리). 혀의 끝이 치조(잇몸)에 닿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 순음(ㅁ): 입(입술)의 모양 (미(彌)의 첫소리). 입술이 닫혔다 열리는 모양을 본떴다.  

  • 치음(ㅅ): 이(치아)의 모양 (신(戌)의 첫소리). 이 사이로 바람이 새어 나가는 소리의 특성을 반영했다.  

  • 후음(ㅇ): 목구멍의 모양 (욕(欲)의 첫소리). 소리가 목구멍을 통해 울려 나오는 모양이다.  

이 다섯 개의 기본자를 바탕으로 소리의 세기에 따라 획을 더하는 '가획(加劃)의 원리'가 적용된다. 'ㄱ'에 획을 더하면 소리가 거세지는 'ㅋ'이 되고, 'ㄴ'에 획을 더하면 'ㄷ', 다시 더하면 'ㅌ'이 되는 식이다. 이는 음운학적으로 같은 계열의 소리(조음 위치가 같은 소리)들이 형태적으로도 유사성을 갖게 만든 것으로, 현대 언어학자들도 감탄하는 체계적인 시스템이다. 배우는 사람은 기본자 5자만 익히면 나머지 글자들을 직관적으로 유추할 수 있다.

천지인(天地人)... 우주를 담은 모음

자음이 인간의 몸(발음 기관)을 본떴다면, 모음은 인간이 살아가는 우주를 담았다. 세종은 성리학적 세계관인 천(天), 지(地), 인(人) 삼재(三才)를 형상화하여 모음을 설계했다.  

  • 천(·): 둥근 하늘의 모양 (양성 모음의 기본)

  • 지(ㅡ): 평평한 땅의 모양 (음성 모음의 기본)

  • 인(ㅣ): 땅 위에 서 있는 사람의 모양 (중성 모음의 기본)

이 세 가지의 단순한 기호를 조합(합용)함으로써 수많은 모음을 만들어냈다. '·'와 'ㅡ'가 만나면 'ㅗ', '·'와 'ㅣ'가 만나면 'ㅏ'가 되는 식이다. 이는 가장 단순한 요소(점, 선)로 가장 복잡한 소리의 세계를 표현해낸 '미니멀리즘'의 극치다. 또한, 하늘(양)과 땅(음) 사이에 사람(중)이 조화를 이룬다는 철학적 메시지는 한글이 단순한 기능적 도구를 넘어 인본주의 철학을 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모음 체계는 현대 디지털 기기의 입력 방식(천지인 자판)에도 그대로 적용될 만큼 미래지향적이다. 600년 전의 철학이 오늘날의 기술과 만나는 접점이다.

최만리의 반대 상소... "오랑캐가 되려 하십니까"

1444년 2월 20일,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를 비롯한 7인의 학자가 연명으로 훈민정음 반대 상소를 올린다. 이 상소문은 당시 지배 엘리트들의 세계관과 한글 창제에 대한 두려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문건이다. 그들의 반대 논리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사대(事大)의 명분이다. "중국을 섬기는 도리에 있어, 독자적인 문자를 만드는 것은 오랑캐나 하는 짓이며 대국(명나라)의 비웃음을 살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들에게 문명(Civilization)은 곧 한자 문화권에 속하는 것이었고, 이를 벗어나는 것은 야만으로의 회귀였다. 둘째, 학문의 쇠퇴 우려다. "언문은 배우기 쉬워, 이를 익히면 성리학과 같은 어려운 학문을 하지 않아 인재가 줄어들 것"이라는 엘리트주의적 시각이다. 셋째, 정치적 위험성이다. "하물며 만에 하나도 정치하는 도리에 유익됨이 없사온데... 실로 시민의 학업에 손실되옵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한 것은 '쉬운 문자' 그 자체였다. 정인지가 서문에서 밝혔듯 "지혜로운 자는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깨우치고, 어리석은 자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는" 글자였다. 글이 쉬워지면 누구나 법을 알게 되고,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게 된다. 이는 사대부가 독점하던 '정보'와 '해석의 권력'이 무너짐을 의미했다. 최만리의 상소는 단순한 보수주의가 아니라, 기득권 방어 논리의 정점이었다.

세종의 반격: "너희가 운서를 아느냐"

세종은 평소 신하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토론의 제왕이었으나, 이 문제에서만큼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최만리 등에게 "너희가 운서(음운학)를 아느냐? 사성 칠음의 자모가 몇이나 되는지 아느냐?"라며 학문적 무지를 질타했다. 이는 세종이 한글을 단순한 '편의 도구'가 아닌, 음운학적 원리에 입각한 고도의 과학적 체계로 설계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세종은 "설총의 이두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냐? 나 역시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는 것이다"라며 '애민'이라는 더 큰 명분으로 사대부의 '사대' 명분을 눌렀다. 그는 한글을 통해 백성들이 억울한 형벌을 피하고(법률 지식의 보급), 자신의 뜻을 펴게 하려는 명확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조선 왕조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지적, 정치적 투쟁 중 하나였다.

연산군의 탄압과 언문의 생존

세종 사후, 한글은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특히 폭군 연산군은 한글이 가진 '고발의 힘'을 두려워했다. 1504년, 자신의 난행과 패륜을 비판하는 익명의 투서가 한글로 쓰여 곳곳에 나붙자, 연산군은 대로했다. 그는 즉시 "언문을 가르치지도 말고 배우지도 말며, 이미 배운 자는 쓰지 못하게 하라"는 전대미문의 '언문 금지령'을 내렸다. 한글 책을 모조리 거두어 불태우고(분서), 한글을 아는 자들을 색출하여 고문했다. 이때부터 한글은 공식적인 문자의 지위에서 밀려나 '언문(상스러운 글)', '암클(여자들이나 쓰는 글)'로 비하되었다.

되살아나는 목소리... 민중이 지킨 글자

그러나 권력의 칼날로도 이미 백성들의 혀와 손끝에 스며든 글자를 도려낼 수는 없었다. 규방의 여인들은 내방가사(규방가사)를 통해 자신의 삶과 한(恨)을 한글로 기록했고, 불교계는 불경을 한글로 번역(언해)하여 민중 포교에 앞장섰다. 서민들은 한글 소설을 읽으며 울고 웃었고, 편지를 통해 소식을 전했다. 심지어 왕실 내부에서도 왕비와 공주들이 은밀하게 한글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선조나 정조 같은 왕들도 사적인 편지에서는 한글을 즐겨 사용했다.

권력이 공식적으로 버린 글자를 민중이 주워 품은 셈이다. 이는 한글이 단순한 위로부터의 하달(top-down) 문자가 아니라, 민중의 삶 속에서 뿌리내려 아래로부터(bottom-up) 생명력을 얻은 문자임을 증명한다. 이 끈질긴 생명력은 훗날 일제강점기라는 더 큰 시련을 이겨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민족말살통치와 조선어학회

1910년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민족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우리말과 글을 철저히 탄압했다. 1930년대 후반부터는 학교에서 한국어 사용을 전면 금지하고 일본어 사용을 강요(국어 상용 정책)했으며, 창씨개명을 통해 이름마저 일본식으로 바꾸게 했다. 말이 사라지면 민족의 혼도 사라진다는 절체절명의 위기감 속에서, 주시경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조선어학회'가 결성되었다.  

그들의 목표는 단 하나, 우리말 '사전'을 만드는 것이었다. 사전을 만든다는 것은 흩어진 우리말을 모아 표준을 세우고, 언어의 독립을 선언하는 행위였다. 1929년 시작된 이 거대한 프로젝트는 '말모이(말을 모으다) 작전'이라 불렸다. 이는 몇몇 지식인들의 작업이 아니었다. 조선어학회는 잡지 〈한글〉을 통해 전국의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시골말을 캐어 보내주시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다. 전국 각지의 남녀노소가 자신이 쓰는 사투리, 토박이말, 고유어를 적어 조선어학회로 보냈다. 수천 통의 편지가 쏟아졌다. 이는 단순한 어휘 수집이 아니라, 온 겨레가 참여한 거국적인 언어 독립운동이었다.

33인의 희생과 서울역 창고의 기적

그러나 일제의 감시는 집요했다. 1942년, 일제는 함흥 영생고등보통학교 학생의 일기장에서 "국어를 썼다가 꾸중을 들었다"는 문구를 트집 잡아 '조선어학회 사건'을 조작했다.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등 주요 학자 33인이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이윤재, 한징 선생은 끝내 감옥에서 순국했다.  

더욱 비통한 것은 그들이 13년 동안 피땀 흘려 모은 '조선말 큰사전' 원고 2만 6,500여 장이 증거물로 압수되어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1945년 해방이 되었지만, 원고가 없으면 사전을 출판할 수 없었다. 학자들은 망연자실했다. 그런데 1945년 9월 8일, 거짓말 같은 일이 벌어졌다. 서울역 조선통운 창고 구석에서 버려진 종이 뭉치가 발견된 것이다. 바로 일제가 폐지 처분을 하려다 방치했던 그 '조선말 큰사전' 원고였다.  

어두운 창고 먼지 속에 묻혀 있던 그 원고 뭉치는 단순한 종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고문 속에서도 우리말을 지키려 했던 선열들의 피였고, 나라 잃은 백성들이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보낸 염원이었다. 이 극적인 발견이 없었다면, 우리는 오늘날처럼 풍부하고 아름다운 우리말 어휘를 누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 원고는 현재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되어 그날의 치열했던 투쟁을 증언하고 있다.  

'한글'... "권력의 독점에서 인간의 해방으로" [KAVE=박수남 기자]

AI와 가장 친한 문자... 세종의 알고리즘

21세기, 한글은 또 다른 혁명의 중심에 서 있다. 바로 디지털과 인공지능(AI)의 시대다. 한글의 구조적 특성은 현대 컴퓨터 공학과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 한글은 자음과 모음이라는 요소(Phoneme)를 조합하여 글자(Syllable)를 만드는 모듈식 구조를 가지고 있다. 초성 19자, 중성 21자, 종성 27자를 조합하면 이론적으로 11,172자의 서로 다른 소리를 표현할 수 있다. 이는 수만 개의 완성형 문자를 따로 입력하고 코딩해야 하는 한자(Chinese characters)나, 불규칙한 발음 체계를 가진 영어에 비해 정보 입력 속도와 처리 효율성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한다.  

특히 생성형 AI가 자연어를 처리하고 학습하는 데 있어서도 한글의 논리적 구조는 큰 강점을 가진다. 규칙적인 제자 원리(상형+가획+합용) 덕분에 AI가 언어의 패턴을 분석하기 용이하며, 상대적으로 적은 데이터로도 자연스러운 문장을 생성할 수 있다. 세종이 600년 전에 붓으로 설계한 '알고리즘'이 오늘날 최첨단 반도체와 서버 속에서 다시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한글은 단순한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가장 효율적인 '디지털 프로토콜'이다.

세계가 인정한 기록유산... 인류의 자산

1997년, 유네스코는 훈민정음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했다. 전 세계에는 수천 개의 언어와 수십 개의 문자가 있지만, 문자를 만든 사람(세종)과 창제 시기(1443년), 창제 원리, 그리고 사용법을 상세히 설명한 해설서(훈민정음 해례본)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문자는 한글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이는 한글이 자연 발생적으로 진화한 문자가 아니라, 고도의 지적 능력과 철학을 바탕으로 치밀하게 기획되고 발명된 '지적 창조물'임을 세계가 공인한 것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펄 벅(Pearl S. Buck) 여사는 한글을 두고 "전 세계에서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훌륭한 글자"라며, "세종은 한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문맹 퇴치에 기여한 개인이나 단체에게 주는 유네스코 상의 이름이 '세종대왕 문해상(King Sejong Literacy Prize)'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세종이 한글을 만든 것은 단순히 백성들이 편지를 쓰고 농사짓는 법을 익히게 하려는 실용적인 목적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백성에게 '소리'를 돌려주기 위함이었다. 억울하면 억울하다고 소리치고, 부당하면 부당하다고 기록하게 하여, 그들을 침묵의 감옥에서 해방시키려는 급진적인 인권 선언이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 선열들이 목숨을 걸고, 전국의 민초들이 꼬깃꼬깃한 편지로 사투리를 모아 보낸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단순히 사전을 만드는 일이 아니었다. 일본어라는 제국의 언어에 짓눌려 질식해가는 민족의 '정신'과 '영혼'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투쟁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스마트폰으로 자유롭게 메시지를 보내고, 인터넷에 자신의 의견을 남길 수 있는 것은 600년의 시간 동안 권력과 싸우고, 억압을 견디며, 끝내 살아남은 사람들의 피와 땀 덕분이다.

한글은 단순한 문자가 아니다. 그것은 "백성을 가엾게 여겨" 시작된 사랑의 기록이며, "모든 사람이 쉽게 익혀" 세상의 주인이 되게 하려 했던 민주주의의 원형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위대한 유산을 너무나 당연하게 누리고 있지는 않은가. 현대 사회 곳곳에는 여전히 소외된 이들의 침묵이 존재한다. 한국 사회의 이주 노동자들, 장애인들, 빈곤층... 그들의 목소리는 과연 우리 사회의 중심부로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가.

세종이 꿈꿨던 세상은 모든 백성이 자신의 뜻을 능히 펴는(伸) 세상이었다. 우리가 한글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 문자로 지금 시대의 '실린 소리(목소리를 잃은 자들의 소리)'를 기록하고 대변할 때, 비로소 훈민정음의 창제 정신은 완성될 것이다. 역사는 단순히 기록하는 자의 것이 아니라, 그 기록을 기억하고, 행동하고, 소리 내어 외치는 자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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