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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다 한 잔에 담긴 시대의 분노 ‘영화 베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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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을 징벌하고, 형사에 환호하는 영화 52회 백상예술대상 영화감독상 수상작

[KAVE=최재혁 기자] 류승완 감독의 '베테랑'은 첫 장면부터 관객의 기분을 쫙 끌어올린다. 중고차 밀수 조직 검거 작전에서 서도철(황정민) 형사와 강력반 팀원들이 몸을 날리며 범인을 쫓는 시퀀스는, 마치 '오션스 일레븐'을 동네 파출소 버전으로 옮겨놓은 듯 경쾌하고 흥겹다. 한국 사회의 답답한 현실을 다루는 영화라는 걸 잠시 잊게 만들 정도다.

허술하지만 팀워크 좋은 형사들, 쉴 새 없이 오가는 농담, 육탄전과 뒤엉킨 카메라 워킹 속에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이 강력반의 세계로 이입하게 된다. 도청과 매복, 허탕과 허세가 뒤섞인 그들의 일상은 마치 오랜 시간 함께 뛰어온 직장 동료들을 관찰 예능처럼 구경하는 느낌에 가깝다. '이게 국가 공권력의 민낯이라고?'라는 생각이 들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정이 가고 믿음직스럽다. 완벽한 시스템보다 삐걱거리는 인간미가 더 신뢰를 주는 아이러니.

그러던 어느 날, 서도철은 한 택배 트럭 기사(정웅인)를 통해 낯선 사건과 마주한다. 오랜 시간 일만 하며 버텨온 이 트럭 기사는 임금 체불과 구조조정에 시달리다 사장의 폭언·폭행과 맞닥뜨린다. 뭔가 크게 잘못됐음을 직감한 도철은 단순 노동 사건이라 넘기기엔 뭔가 찝찝하다. 베테랑 형사의 촉은 틀린 법이 없으니까.

사건을 파고들수록 그 뒤에는 재벌 3세 조태오(유아인)와 그의 회사, 그리고 그를 둘러싼 변호인단과 경호팀, 온갖 로비 구조가 '어벤져스' 진용만큼이나 촘촘하게 얽혀 있음을 알게 된다. 현장에서 피 흘리는 사람들은 언제나 노동자들인데, 책임을 져야 할 당사자는 번듯한 빌딩 꼭대기에서 와인 잔을 흔들며 미소만 짓고 있는 구조. 마치 게임판의 밑바닥 캐릭터는 HP가 깎이는데, 보스 캐릭터는 무적 모드를 켜놓은 것처럼 불공평한 세계가 그대로 펼쳐진다.

조태오, 우리가 상상해 온 모든 악몽의 총합

조태오는 그동안 한국 관객이 머릿속으로만 상상해오던 '재벌 3세 클리셰'를 한데 모아 놓은 듯한 인물이다. '스카페이스'의 토니 몬타나가 범죄로 성공한 이민자라면, 조태오는 태어날 때부터 치트키를 들고 나온 케이스다. 말끝마다 비아냥이 배어 있고,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눈빛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유흥을 즐기고, 폭력을 마치 '플레이스테이션' 게임처럼 쓰고, 돈과 권력을 믿고 어떤 선도 넘어도 괜찮다고 확신한다. 그는 단순히 악당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가 만들어낸 괴물이다. '다크 나이트'의 조커가 "사회가 나를 만들었다"고 말한다면, 조태오는 "사회가 내 아버지 것이다"라고 말하는 셈이다.

서도철과 그의 팀은 이 괴물 같은 젊은 재벌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지만, 수사 기록이 '후디니'의 마술처럼 사라지고, 증언이 손바닥 뒤집듯 번복되고, 경찰 윗선이 묘하게 눈치를 보는 현실 앞에서 계속 벽에 부딪힌다. 정의감만으로는 도저히 뚫리지 않을 것 같은 거대한 방탄 유리벽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셈이다. 이게 바로 21세기형 성곽이다. 중세 시대엔 돌담과 해자로 성을 지켰다면, 지금은 변호사와 로비스트로 방어막을 친다.

그 와중에도 강력반 사무실은 늘 시끌벅적하다. 팀원들은 조태오의 범죄를 입증할 작은 증거 하나를 잡기 위해 사무실, 유흥가, 병원, 회사 주변을 마치 '미션 임파서블' 팀처럼 뛰어다니며, 실패해도 다시 욕 한 마디 하고 웃으면서 다음 수를 짠다. 이들의 끈기는 '록키 발보아'의 그것과 닮았다. 한 방에 KO당할 것 같아도 다시 일어서고, 또 맞고, 또 일어선다.

도철은 트럭 기사 가족과 마주하며 '이 사람들 몫까지 싸워야 한다'는 묵직한 책임감을 품게 되고, 조태오는 그런 도철을 벌레 보듯 깔보면서도 어딘가 불편한 감정을 감추지 못한다. 한쪽은 바닥에서 기어 올라가는 형사, 다른 한쪽은 제왕처럼 군림하는 재벌 3세. 마치 '레 미제라블'의 자베르와 장 발장의 대립을 현대 서울로 옮겨놓은 듯한, 두 사람의 대립 구도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점점 더 노골적인 전면전으로 치달아 간다.

이야기는 점점 '법의 테두리 안에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와 '법의 테두리가 아예 뚫려 있는 상대를 어떻게 붙잡을 것인가'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간다. 돈으로 변호사를 사고 언론을 관리하고, 심지어 피해자마저 회유하려 드는 조태오의 행태는, 관객에게 불편함과 동시에 기시감을 선사한다.

뉴스에서 보던 '땅콩 회항', '물컵 갑질', '폭행 논란'의 장면들이 스크린 위에서 과장된 형식으로 재연되는 듯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조태오는 우리가 포털 실시간 검색어에서 봐왔던 모든 재벌 갑질 사건의 집대성이다. 서도철은 법과 원칙을 지키려 애쓰면서도, 어느 순간부터는 '적어도 이 정도까지는 해야 균형이 맞는다'는 분노에 점점 더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마치 복싱 경기에서 한쪽은 글러브를 끼고 싸우는데, 상대는 너클을 낀 것 같은 불공정함.

결말부로 갈수록 영화는 긴장과 웃음을 동시에 끌어올린다. 강력반 팀은 조태오 일당의 범죄 정황을 마치 '오피스' 시리즈의 짐이 프랭크를 골탕 먹이듯 하나둘 모아 나가며, 마지막 한 방을 위해 숨을 고른다. 조태오 역시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자신의 성을 방어하기 위해 더 대담하고 악의적인 선택을 감행하며, 서도철과 팀원들을 노골적으로 조롱한다.

거대한 쇼다운 직전에 관객이 느끼는 감정은 단순한 '악당 응징' 기대감이 아니라, 현실에서는 보기 힘든 장면을 드디어 볼 수 있을 것 같은 모종의 해방감에 가깝다. 마치 복권 당첨을 기다리는 심정, 혹은 월드컵 결승전 페널티킥 직전의 그 짜릿한 긴장감. 어떻게 끝나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다만 영화가 마지막까지 관객이 원하던 감정의 급소를 정확히 겨냥한 채 '쾌속구'처럼 힘 있게 내달린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장르의 연금술사, 류승완의 균형 감각

'베테랑'의 작품성은 무엇보다 장르의 균형감에서 빛난다. 이 영화는 수사극, 코미디, 액션, 사회 풍자를 동시에 껴안고 있지만 어느 하나로 완전히 규정되지는 않는다. 마치 셰프가 단맛, 신맛, 짠맛, 매운맛을 정확한 비율로 섞어내듯, 류승완은 각 장르의 요소를 절묘하게 배합한다.

진지한 노동·재벌 문제를 다루면서도 '다크 나이트'처럼 지나치게 무겁게 가라앉지 않고, 그렇다고 '행오버'처럼 웃음으로만 덮어버리지도 않는다. 심각한 장면 직후에 터지는 농담, 긴장감 높은 추격 뒤에 들어가는 리듬감 좋은 음악이 서로를 상쇄하기보다, 오히려 관객의 감정을 더 크게 흔들어놓는다. 웃다가 갑자기 분노가 치밀고, 속이 다 시원해지는 장면 뒤에 알 수 없는 씁쓸함이 스며드는 구조. 이건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정교하게 설계된 감정의 롤러코스터다.

류승완 특유의 액션 감각도 빼놓을 수 없다. '베테랑'의 액션은 '존 윅'의 총기 발레나 '매트릭스'의 와이어 액션처럼 기술이 화려해서라기보다 '타격감'이 정확하다. 좁은 공간에서 엎치락뒤치락하는 몸싸움, 차가 오가는 도로 위에서 벌어지는 추격전, 건물 내부를 종횡무진하는 쫓고 쫓기는 장면들이 마치 '본 시리즈'의 긴박함처럼 리듬감 있게 이어진다.

캐릭터 하나하나의 움직임에 성격이 실려 있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서도철의 싸움은 거칠지만 땅에 붙어 있고, 조태오의 폭력은 철없는 장난처럼 시작해 순식간에 잔인함으로 치닫는다. 동작만 봐도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감이 오는 액션이다. '말보다 주먹이 더 많은 걸 말한다'는 격언을 영화적으로 증명한 셈.

배우들의 연기는 '베테랑'을 단순한 오락영화 이상의 것으로 끌어올린다. 황정민이 연기하는 서도철은 '수호자' 시리즈의 덴젤 워싱턴 같은 '착한 경찰'의 반듯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입은 거칠고 손도 빠르며, 윗사람에게 바른말을 하기보다 상황을 먼저 파악하는 쪽에 가깝다.

그런데도 관객이 그를 응원하게 되는 이유는, 끝까지 타협하지 않는 어떤 선이 분명히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완벽한 영웅이 아니라, 우리 중 가장 용기 있는 한 명처럼 느껴진다. 마치 '브루클린 나인나인'의 제이크 페랄타가 현실에 발을 딛고 한국 형사가 된 것 같달까.

유아인의 조태오는 한국영화사에서 보기 드물게 '완성도 높은 악당'으로 남는다. '다크 나이트'의 조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시거처럼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면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혀 짧은 웃음, 심심함을 못 이겨 사람을 괴롭히는 태도, 분노조차 지루해하는 표정이 하나로 모여 묘하게 중독적인 악역을 만들어낸다. 이 둘의 대립이야말로 영화의 핵심 동력이고, 관객이 극장을 찾는 진짜 이유다.

왜 1,341만 명이 극장을 찾았을까?

'베테랑'이 대중적으로 이렇게 큰 사랑을 받은 이유는, 관객이 현실에서 느껴온 답답함을 영화가 정확히 언어화·장면화해 주기 때문이다. 뉴스에서 보던 갑질, 재벌가의 일탈, 돈이면 다 된다는 태도가 극 중에서는 조금 과장된 형태로 튀어나오지만, 관객은 그 과장이 오히려 더 솔직하다고 느끼게 된다.

마치 '뉴욕 타임스' 기사를 읽는 것보다 존 올리버의 풍자 코미디를 볼 때 더 현실이 명확하게 보이는 것처럼. 그리고 그 앞에서 서도철과 강력반이 보여주는 행동은, 현실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통쾌하게 한 번 엎어주는' 판타지에 가깝다.

그러면서도 영화는 끝까지 현실의 무게를 잊지 않고, 웃음과 사이다 뒤에 씁쓸한 잔향을 남겨놓는다. "이게 영화니까 가능한 거지, 현실은..."이라는 뒷맛. 바로 이 복합적인 감정이 '베테랑'을 반복 관람 가능한 작품으로 만든다. 한 번 보면 '시원하다', 두 번 보면 '쓰리다', 세 번 보면 '우리가 뭘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서도철이 조태오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맞붙는 장면들을 따라가다 보면, 관객은 자신이 직접 그 자리에 서 있는 듯한 대리 만족과 동시에 '현실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질문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단순한 스트레스 해소용 오락물로 보기엔 너무 정확하게 한국 사회의 특정 단면을 찌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분노의 질주' 시리즈가 아니라, '분노의 이유'를 설명하는 영화다.

또한 장르영화를 사랑하는 관객이라면, '베테랑'을 통해 한국 상업영화가 액션·코미디·사회 비판을 어떻게 세련되게 섞어낼 수 있는지 확인하게 될 것이다. 류승완 감독 특유의 호흡, 배우들의 디테일한 연기, 팀플레이가 살아 있는 앙상블 구조는, 영화를 여러 번 돌려보며 장면마다 따로 뜯어봐도 질리지 않는 완성도를 보여준다. 마치 좋아하는 앨범을 반복 재생하듯, 볼 때마다 새로운 디테일이 발견된다.

반대로 '기생충'이나 '살인의 추억' 같은 무거운 사회파 영화는 부담스럽지만, 그렇다고 '극한직업'처럼 가벼운 코미디만 보고 싶진 않은 관객에게도 '베테랑'은 적당히 웃기고, 적당히 화나게 하고, 적당히 후련한, 딱 좋은 균형의 한 편으로 다가갈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현실에 지친 평범한 관객이 스크린을 통해나마 한 번 시원하게 웃고, 동시에 우리가 사는 사회의 모양을 슬쩍 돌아보게 만드는, 꽤 영리한 오락영화다. '베테랑'은 우리에게 사이다 한 잔을 건네면서도, 그 잔 밑바닥에는 '이제 어떻게 할 거야?'라는 질문을 가라앉혀 놓았다.

2015년 개봉 당시 1,341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지금도 넷플릭스나 케이블에서 재방송될 때마다 시청률 상위권에 오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대가 변해도, 우리가 느끼는 분노와 해방감은 여전히 유효하니까. '베테랑'은 단순히 잘 만든 영화가 아니라, 시대의 정서를 정확히 포착한 문화적 사건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그 여진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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