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agazine Kave=이태림 기자] 밤마다 같은 꿈을 꾸는 남자가 있다. 불이 꺼진 거실 소파에 축 늘어진 채 누워 있던 복귀주(장기용)는 문득 눈을 감았다 뜨면, 과거의 어느 '행복했던 순간' 한가운데 서 있다. 어린 딸 이나와 나란히 앉아 생일 케이크의 초를 끄던 밤, 한때 사랑했던 아내와 웃으며 셀카를 찍던 저녁, 가족들이 모여 떠들썩하게 밥을 먹던 식탁. 귀주는 그때로 돌아가 공기를 맡고, 사람들의 표정을 바라보고, 스스로도 웃는다. 마치 어바웃 타임의 팀처럼, 하지만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거에 갇히기 위해.
하지만 그 어떤 순간에도 손을 뻗어 과거를 바꿀 수는 없다. 시간은 되감기지만, 운명은 고정된 채다. 그래서 그의 능력은 점점 위로가 아니라 고문이 되어 간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행복만 되풀이해서 본다는 건, 결국 지금 자신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확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VR 헤드셋으로 과거의 홈비디오만 무한 반복 재생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초능력 가문의 몰락: X-Men이 번아웃에 걸렸다면
귀주의 집안은 한때 '초능력 가문'으로 불리던 복씨 집안이다. 할머니 복만흠(고두심)은 예지몽을 꾸어 가족의 미래를 훤히 내다보고, 누나 복동희(수현)는 하늘을 나는 능력을 타고났다. 딸 복이나(박소이)는 아직 능력이 발현되지 않았지만, 모두들 언젠가는 특별한 힘을 갖게 될 거라고 믿었다. 마치 인크레더블 가족처럼, 하지만 슈퍼히어로 활동 없이.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무언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다. 만흠은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리며 꿈 자체를 꾸지 못하는 몸이 되고, 동희는 폭식과 체중 증가로 인해 더 이상 날 수 없다. 귀주는 우울증과 무기력에 잠식되면서 과거로 향하는 문이 점점 좁아지는 걸 체감한다. 초능력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현대인의 병리와 함께 녹슬어 버린 셈이다. 마치 로건이 늙어가며 힐링 팩터를 잃듯, 하지만 전투가 아니라 우울증 때문에.
이 지지부진한 일상 속으로 어느 날, 도다해(천우희)가 걸어 들어온다. 다해는 교통사고를 빙자한 보험 사기 현장에서, 수상쩍은 가족들과 함께 사람들의 약점을 파고드는 삶을 살아온 인물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밝고 싹싹한 젊은 여성, 그러나 뒤에서는 계획적으로 '먹잇감'을 고르는 팀의 일원이다. 마치 행크스 부부가 레이디킬러스에서 노부인을 타깃으로 삼듯. 그가 새 타깃으로 점찍은 것이 바로, 넓은 마당과 크고 기묘한 집을 가진 복씨 가족이다. 다해는 우연을 가장해 귀주의 집 근처를 맴돌고, 만흠과의 뜻밖의 인연을 발판 삼아 이들의 삶에 스며든다. 처음에는 베개를 들고 하룻밤 신세 지는 수준이던 방문이, 어느새 '세 들어 사는 가족'이 되는 순간까지 이어지는 과정이 꽤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복씨 집에 들어온 다해는 곧 이 집안의 이상함을 눈치챈다. 밤마다 잠에 들지 못해 TV 앞을 배회하는 만흠, 창문 틈으로 몰래 음식을 배달시켜 폭식하는 동희, 또래와 어울리길 두려워하면서도 스마트폰 속 세상에 중독된 이나.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집 안 한구석에서 늘 낡은 티셔츠 차림으로 웅크려 있는 귀주다. 그는 딸의 학교 행사에도 제대로 가지 못하고, 집 안에서도 누구와 눈을 맞추지 않으려 한다. 다해의 눈에 귀주는 '도와줘야 할 사람'이라기보다 '속이기 쉬운 사람'에 더 가깝다. 감정이 무뎌진 듯 보이고, 삶에 대한 의지가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실버 라이닝 플레이북의 팻처럼, 하지만 조깅이 아니라 소파에서 움직이지 않는.
하지만 우연히 귀주의 비밀을 목격한 순간, 다해의 표정은 미묘하게 변한다. 불길한 사고가 일어난 현장에서, 귀주는 잠시 눈을 감고 다시 뜬 뒤, 누구보다 먼저 사람을 구해 내는 모습을 보인다. 과거로 후퇴하는 능력을 철저히 숨기고 있던 귀주가, 다해 앞에서만큼은 본능적으로 그 힘을 사용해 버린 것이다. 마치 언브레이커블에서 데이비드 던이 자신의 능력을 처음 깨닫듯. 다해는 이 가족이 단순히 '부자'나 '허술한 사람들'이 아니라, 말 그대로 다른 차원의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동시에, 자신이 끼어들어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운명의 결이 훨씬 크다는 것을 직감한다.
다해는 본래의 목적을 위해 귀주에게 접근한다. 상처 많은 남자에게 다정함을 건네고, 이나와도 친해지며, 집안 어른들의 신뢰를 얻는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본인이 더 크게 흔들린다. 우울 때문에 과거에 갇혀 사는 귀주, 병 때문에 능력을 잃어 버린 가족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향해 숨죽인 채 걱정하고 있는 이 집안의 모습을 보는 순간마다, 다해는 자신의 삶과 거짓말을 낯설게 바라보게 된다. 마치 대부에서 케이가 마이클의 세계를 알아가듯, 하지만 마피아가 아니라 초능력 가족의.
특히 귀주와 이나 사이에 끼어들어 생일 선물을 골라 주고, 둘 사이의 서툰 대화를 이어 주는 장면들은 중요하다. 귀주는 딸에게 무엇을 사줘야 할지도 모르는 서툰 아버지이고, 이나는 그런 아버지를 '무능하다'고 느끼면서도 동시에 기대를 버리지 못하는 아이이다. 다해는 이 둘 사이에 가교가 되어 준다. 귀주가 과거의 행복으로만 도망치던 사람에서, 지금의 행복을 직접 만들어 보려 애쓰는 사람으로 조금씩 변화하는 지점에, 다해의 존재가 촉매처럼 작용하는 셈이다. 마치 메리 포핀스가 뱅크스 가족을 치유하듯, 하지만 마법 가방 대신 사기 기술로.

가짜 가족 vs 진짜 가족...누가 더 진짜인가
한편 다해의 가족도 만만치 않다. 표면적으로는 서로를 '엄마', '이모', '삼촌'이라 부르며 다정한 가족을 연기하지만, 실상은 같은 범죄를 공유하는 공범 집단에 가깝다. 백일홍(김금순)을 중심으로 한 이 가족은 복씨 집안의 재산을 노리고 철저한 계획을 세운다. 마치 오션스 일레븐이, 하지만 카지노가 아니라 초능력 가족을 타깃으로. 그레이스(류아벨), 노형태(최광록) 같은 파트너들은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점점 다해의 감정 변화를 불편하게 바라본다. 다해가 복씨 집안의 상처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특히 귀주와 이나를 향한 마음이 커질수록, '사기'와 '진심' 사이의 경계는 뒤엉키기 시작한다.
중반 이후, 만흠의 예지몽은 점점 더 어두운 미래를 암시하고, 이 가족이 다시 능력을 되찾는 대신 누군가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짙게 깔린다. 복씨 집안과 다해 가족은 서로의 비밀을 눈치채면서 첨예하게 부딪히고, 동시에 외부의 범죄 세력과도 엮이면서 서사의 긴장감은 한층 높아진다. 초능력, 사기, 가족, 사랑이 한데 엉킨 판타지 로맨스는 그렇게 마지막까지 "과연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물고 간다. 결말에서 어떤 선택과 희생이 펼쳐지는지는 직접 보는 편이 좋다. 이야기는 분명 로맨스와 힐링을 표방하지만, 그 감동이 결코 가볍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장르의 신선한 비틀기, 회피가 아닌 직면으로
이 드라마는 '초능력 가족'이라는 다소 익숙한 설정을 아주 한국적인 현실감과 결합해 신선하게 변주한다. 복씨 가족의 능력은 히어로물에서 흔히 보던 화려한 초월 능력이지만, 이 힘이 사라지는 이유는 너무도 현실적이다. 우울증, 불면증, 폭식, 스마트폰 중독 같은 현대인의 질병이 초능력의 기능을 하나씩 갉아먹는다. "세상을 구할 힘이 있는 사람들도 자기 삶 하나 제대로 건사하기 어렵다"는 말이 농담이 아니라 설정 그 자체가 된다. 마치 히어로즈 시즌 1의 슈퍼히어로들이, 하지만 외계인이 아니라 정신과 진단서 때문에 무너지는.

복귀주의 시간 여행 능력은 특히 인상적이다. 그는 과거를 바꾸지 못한다. 단지 이미 지나간 행복을 다시 보고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이 힘은 처음에는 부러운 능력처럼 보이지만, 곧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과거의 좋은 기억만 곱씹으며 현재를 회피하는 모습"이라는 상징으로 읽힌다. 마치 이터널 선샤인에서 조엘이 기억을 지우려 하듯, 하지만 반대 방향으로. 드라마는 귀주가 이 능력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의 삶이 달라진다는 점을 보여준다. 더 이상 과거로 도망치지 않고, 다해와 함께 지금의 현실을 바꾸기 위한 도구로 능력을 사용하려 할 때, 그때 비로소 이 판타지 설정이 힐링 서사와 맞물린다. 시간 여행이라는 장르 장치를 정신건강과 치유의 드라마로 끌어오는 방식이 꽤 섬세하다.
연출은 '가족극'과 '로맨스', '판타지'의 톤을 묘하게 섞어 낸다. 복씨 집의 내부 공간은 언제나 약간 빛이 번지는 듯한 채도와 색감으로 찍히는데, 낡은 양옥과 정원, 지하 창고가 동시에 존재하는 이 집은 일종의 '마음의 구조'처럼 느껴진다. 거실은 가족의 감정이 부딪히는 전면 무대이고, 옥상은 귀주와 다해가 비밀을 나누는 성역이며, 계단과 복도는 과거와 현재, 진심과 거짓 사이를 오가는 통로처럼 활용된다. 마치 업의 칼 할아버지 집이 기억의 박물관이듯. 초능력의 사용 장면도 과장된 CG 대신, 빛과 사운드, 프레임 전환을 중심으로 차분하게 연출해 훨씬 감정적으로 와 닿는다.
3막 구조, 동화에서 스릴러로
이야기의 리듬은 초반과 중반, 후반이 조금씩 다르게 박동한다. 초반부는 복씨 가족의 사연 소개와 다해의 침투 과정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동화적인 판타지와 코미디가 강조된다. 우울하지만 어딘가 웃긴, 지극히 한국적인 가족 풍경 속에 갑자기 초능력이 튀어나오는 맛이 있다. 중반부에는 로맨스와 가족 치유가 본격화되면서, 귀주와 다해, 이나 세 사람의 관계가 중심을 잡는다. 후반부로 갈수록 범죄·스릴러적 요소가 두드러지고, 다해 가족의 범죄 행각과 복씨 가족의 비밀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면서 극의 톤이 다소 선 굵게 변한다. 마치 파라사이트가 코미디에서 스릴러로 전환되듯. 이 과정에서 일부 시청자는 "힐링 판타지에서 갑자기 막장 스릴러로 치닫는다"는 느낌을 받았을 법하다. 그러나 작품이 처음부터 지향한 것은 '현대인의 병과 상처를 판타지로 가볍게 덮어 버리는 힐링'이 아니라, 그 상처를 끝까지 마주한 뒤에야 얻을 수 있는 뒤늦은 평안에 가깝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갈수록 감정의 밀도도 함께 짙어진다.
연기와 캐릭터 구축 역시 호평할 지점이 많다. 귀주는 전형적인 '능력 잃은 히어로' 캐릭터지만, 늘어진 티셔츠와 부스스한 머리, 툭툭 던지는 건조한 대사 속에 미묘한 츤데레 감성이 숨어 있다. 딸에게 용돈을 쥐여 주고도 제대로 말을 못 건네는 서툰 아버지이자, 사랑을 잃은 남자의 공허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마치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리처럼, 하지만 형제가 아니라 딸과의 관계에서. 다해는 초반에는 계산적인 면이 돋보이다가도, 복씨 가족의 상처를 마주할수록 흔들리는 눈빛을 보여 준다. 두 사람이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는 순간들—예를 들어, 빗속 정원에서 서로의 흔적을 들여다보는 장면이나, 타임슬립 속에서 과거의 다해를 바라보는 귀주의 눈빛—은 판타지 설정 없이도 설득력이 충분한 감정선이다.

조연들의 매력도 빼놓을 수 없다. 만흠은 '가족의 미래를 다 알아 버린 사람'이 짊어진 고독과 불안을 절절하게 보여준다. 마치 도착의 루이즈 뱅크스처럼, 미래를 알지만 막을 수 없는. 동희는 '날 수 있는 여자'라는 판타지 설정과, 외모·체중에 집착하는 현실의 여성상을 교차시키며, 의외로 묵직한 메시지를 남긴다. 이나는 요즘 아이답게 스마트폰과 학교 생활에 매여 있지만, 동시에 누구보다 먼저 어른들의 거짓말과 진심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인물이다. 한 명 한 명의 서브 스토리가 각각 작은 힐링 드라마처럼 기능해, 전체 서사를 풍부하게 만든다.
지겨운 히어로물의 변주 통해 신선함 제공
전통적인 히어로물을 기대하는 이라면 조금 놀랄 수 있다. '히어로는 아닙니다만'의 초능력은 도시를 구하거나 빌런을 쓰러뜨리는 데 쓰이지 않는다. 대신 한 사람의 우울을 덜어내고, 무너진 가족을 다시 엮고, 과거의 상처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데 사용된다. 어벤져스보다는 레지옹, 마블 대신 A24 영화에 가까운. 액션과 스케일을 중시하는 히어로물을 좋아하는 이보다는, 한 사람의 마음이 바뀌는 과정을 끝까지 지켜보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에게 더 어울린다.
또, 가족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어딘가 마음이 복잡해지는 사람이라면 이 드라마에서 묘한 위로를 받을 수 있다. 부모와 자식, 할머니와 손주, 피 한 방울 안 섞인 가짜 가족까지, 수많은 관계가 등장하지만 어느 하나도 완벽하지 않다. 모두가 서툴고 이기적이고 비겁한 면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서로를 포기하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 과장된 대사보다 훨씬 강한 위로로 다가온다. 마치 리틀 미스 션샤인의 후버 가족처럼, 모두 망가져 있지만 함께 가는.
마지막으로, 판타지와 현실의 경계에서 살짝 떠 있는 듯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시청자라면 '히어로는 아닙니다만'을 꽤 오래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 작품을 보다 보면, 언젠가 한 번쯤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나에게도 남들은 모르는 어떤 능력이 있었는데, 어른이 되면서 잃어버린 건 아닐까?" 하고. 그런 질문을 마음 한켠에 품고 있는 사람이라면, 복귀주와 도다해, 그리고 복씨 가족의 여정이 아마 남 얘기처럼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회를 보고 나면 이렇게 중얼거리게 될 것이다. "히어로는 아니지만, 그래도 괜찮다." 세상을 구하지 못해도, 한 사람을 이해하고 한 가족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영웅적일 수 있다는 걸. 그게 바로 이 드라마가 전하는 가장 따뜻한 메시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