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울 앞, 후줄근한 교복 셔츠를 붙잡고 서 있는 한 남자애가 있다. 뚱뚱한 몸에 뒤틀린 어깨, 툭 튀어나온 배, 늘어난 목둘레. 네이버 웹툰 '외모지상주의'의 주인공 박형석이다. 집에서는 엄마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고, 학교에서는 교실 구석 청소도구함 옆이 그의 지정석이다. 복도만 나가면 욕설이 날아오고, 급식실에서는 쟁반이 엎어진다. 같은 반 친구는 그를 "같이 다니면 민폐인 애"라고 소개하고, 선생님조차 노골적으로 차별한다. 이 세계에서 박형석은 철저하게 '못생긴 애'이자 '당해도 되는 애'다. 마치 학교라는 생태계에서 최하위 포식자 취급을 받는 셈이다.
어느 날, 그는 결국 폭발한다. 끊이지 않는 괴롭힘, 엄마까지 욕보이는 상황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학교를 옮기기로 결심한다. 서울로 전학을 가자며 사정하는 아들의 말에, 편의점에서 야간까지 뛰는 엄마는 결국 고개를 끄덕인다. 새 출발을 앞둔 밤, 형석은 좁은 원룸 바닥에서 잠이 들고, 다음 날 눈을 뜨는 순간 믿기 힘든 일이 벌어진다. 거울 속에, "완전히 다른 인간"이 서 있는 것이다. 키 크고, 잘생기고, 근육질에 피부까지 하얀—웹툰 속 흔한 남주 비주얼의 정석. 그런데 그게 자기란다. 카프카가 『변신』에서 그레고르 잠자를 벌레로 만들었다면, 박태준 작가는 박형석을 K-뷰티 화보 모델로 변신시킨 셈이다.
'외모지상주의'의 세계관은 이 기묘한 기점에서 열린다. 형석에게는 두 개의 몸이 생긴다. 원래의 뚱뚱한 몸, 그리고 새로 얻은 잘생기고 완벽한 몸. 하나가 잠들면 다른 하나가 깨어나고, 둘 중 어느 쪽이든 "엄연히 박형석"이다. 가난한 원룸에는 예전 몸이 누워 있고, 반짝이는 새 교복을 입고 새 학교 제일 앞줄에 앉아 있는 건 새 몸이다. 이제 세상은 그를 전혀 다른 사람처럼 대한다. 과거 학교에서 똑같이 늘어져 있던 교복이 '자기관리 못 하는 루저'의 상징이었다면, 새로운 학교에서는 깨끗이 다린 셔츠와 늘씬한 팔다리가 곧 인기의 조건이 된다. 같은 사람인데 포장만 달라졌을 뿐인데, 세상은 180도 다른 반응을 보인다.
외모라는 이름의 계급장
새 학교에서의 첫날은 말 그대로 인생이 뒤집히는 경험이다. 복도에서 부딪혀도 사과를 듣고, 급식 줄에서는 눈웃음을 받는다. 같은 반 친구들은 그를 중심으로 서열을 재편하고, 심지어 선생님마저 태도가 달라진다. "외모가 곧 스펙"이라는 말이 얼마나 노골적으로 작동하는지, 웹툰은 형석의 두 몸을 번갈아 보여주며 아주 적나라하게 증명한다. 잘생긴 몸으로 등굣길을 걸을 때와, 뚱뚱한 몸으로 편의점 야간 알바를 갈 때의 시선은 완전히 다르다. 전자는 ‘멋진 청년’이고, 후자는 ‘비켜야 할 장애물’이다. 같은 영혼이 담긴 두 개의 그릇이 이토록 다른 대접을 받는다니, 이건 SF가 아니라 거의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형석이 전학 온 학교는 겉으로는 평범한 고등학교지만, 사실상 폭력과 계급, 정보력이 얽힌 작은 사회다. 각 반에는 나름의 짱이 있고, 운동부와 비운동부, 부자와 가난한 집, 잘생긴 애와 그렇지 않은 애 사이에 보이지 않는 계단이 놓여 있다. 형석은 잘생긴 몸으로 이 계단을 단숨에 올라간다. 그 과정에서 바스코(이은태), 이진성, 홍재열, 박하늘 같은 인물들을 만난다. 누군가는 정의감 넘치는 싸움꾼이고, 누군가는 겉으로는 양아치지만 속으로는 콤플렉스를 숨겨둔 친구다. 각각의 캐릭터는 학원물의 클리셰를 품고 있으면서도, 조금씩 다른 상처와 욕망을 갖고 있다. 마치 '슬램덩크'의 북산고가 농구로 뭉쳤다면, 이 학교는 주먹과 외모로 서열을 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웹툰은 학교 안 서열 싸움을 넘어, 점점 더 큰 세계로 이야기를 확장해 나간다. 방송 반과 아이돌 지망생이 등장하고, 스트리머와 모델, 연예계와 조직 폭력배, 패션 업계와 프로 격투기, 심지어 글로벌 비즈니스와 정치까지. 형석의 두 몸은 이 세계들을 오가는 통로가 된다. 잘생긴 몸은 모델 일을 하고, 방송에 나오고, '외모지상주의' 사회의 혜택을 제대로 누리게 된다. 반면 원래의 몸은 여전히 편의점 카운터에 서 있고, 집에서는 엄마를 대신해 생계를 돕는다. 둘이 교차하는 장면마다, "도대체 진짜 나다운 모습은 어느 쪽인가"라는 질문이 떠오른다. 브루스 웨인과 배트맨 중 누가 진짜냐는 질문처럼, 이 이중생활은 정체성의 문제로 귀결된다.
작품은 박형석의 성장을 따라가면서 동시에, 외모·계급·폭력·가정폭력·학교폭력·SNS 문화 같은 다양한 문제를 건드린다. 잘생기고 몸 좋은 남자애들만 살아남는 판에서 못생기고 가난한 아이들은 어디로 밀려나는가, "정의의 패거리"를 자칭하는 폭력도 결국 또 다른 폭력이 아닌가, 인터넷과 방송은 어떻게 사람을 소비하는가. 이 질문들은 개별 에피소드에서 사건으로 구체화된다. 단순한 '싸움 잘하는 남고생 만화'가 아니라, 대한민국 10~20대가 겪는 현실과 욕망을 과장된 세계관 안에서 비틀어 보여주는 셈이다.
다만 '외모지상주의'는 장기 연재답게 수많은 인물과 서사가 뒤엉킨 작품이다. 박형석의 두 몸의 비밀, 그 능력의 출처와 관련된 음모, 특정 인물의 정체와 과거, 그리고 여러 조직과 기업의 관계는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더 복잡해진다. 이 모든 실타래가 어디로 수렴하는지, 그리고 형석이 결국 '어떤 얼굴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지는 직접 웹툰을 따라가며 확인하는 쪽이 좋다. 초반의 학원물 감성에서 출발해, 중반 이후에는 사실상 액션·범죄·미스터리가 뒤섞인 세계로 변모하기 때문에, 결말과 핵심 비밀은 스포일러 한 줄로 요약하기엔 아까운 부분이다. 마치 '해리 포터' 시리즈가 1권의 학교 판타지에서 7권의 전쟁 서사로 진화했듯, 이 웹툰도 그만큼의 스케일 변화를 겪는다.
‘거울 앞’ 이중주
'외모지상주의'의 가장 큰 힘은 제목 그대로의 테마, 즉 ‘외모가 곧 계급이 되는 사회’라는 명제를 끝까지 밀어붙인 점에 있다. 단순히 못생긴 애가 미남으로 변신해 인기몰이를 한다는 성장담이 아니다. 두 개의 몸을 동시에 살아야 하는 설정은, 자기혐오와 자기애, 자존감과 자기기만이라는 복잡한 감정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다. 박형석이 잘생긴 몸으로 친구들과 어울리다가도, 원래 몸으로 돌아왔을 때 느끼는 모멸감과 안도감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점이 핵심이다. "이건 진짜 내가 아니야"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이 몸이 없었다면 난 아무것도 아니었겠지"라고 느끼는 모순. 많은 독자가 여기에 강하게 공감한다. 마치 누구나 한 번쯤 꿈꿔본 "만약 내가 예쁘게/잘생기게 태어났다면"이라는 상상을 현실로 만든 동시에, 그 상상이 얼마나 씁쓸한지도 보여주는 것이다.
연출 면에서 이 웹툰은 세로 스크롤 액션의 교과서에 가깝다. 싸움 장면에서 화면을 길게 세로로 뽑아, 주인공의 돌진과 상대의 반격, 떨어지는 몸과 튀는 피를 한 호흡으로 읽게 만든다. 클로즈업된 눈빛, 비에 젖은 운동장, 깜빡이는 형광등 아래 계단 같은 공간들이 반복해서 등장하면서 '외모지상주의식 싸움'의 분위기를 만든다. 과장된 근육과 움직임, 스매시 장면에서의 과감한 데포르메는 현실감보다는 타격감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이건 현실적인 싸움이라기보다는, 청소년기의 분노와 열등감이 만들어낸 일종의 판타지로 읽힌다. '용가리 주먹'이 나오는 건 아니지만, 분명 여기엔 만화적 과장이 있고, 그 과장이야말로 독자에게 쾌감을 선사하는 핵심이다.
캐릭터 구축도 작품의 인기를 끌어올린 요소다. 박형석은 전형적인 '루저 출신 성장형 주인공'이지만, 두 몸을 살아가며 책임과 죄책감을 동시에 짊어진다는 점에서 다른 웹툰의 주인공들과 차별된다. 바스코(이은태)는 ‘정의감 넘치는 바보’처럼 보이지만, 약자를 지키겠다는 강박과 트라우마가 얽힌 인물이다—마치 '나루토'의 록 리처럼, 재능이 아닌 노력으로 승부하려는 캐릭터의 한국형 변주다. 이진성은 폭력과 사랑, 소유욕과 열등감 사이에서 흔들리는 청소년 남성의 전형을 보여준다. 홍재열, 박하늘, 여러 여성 캐릭터들 역시 각자의 개성은 선명하다. 특히 폭력배나 일진으로 등장하는 인물들도, 단순한 악당이 아니라 가정사와 상처를 가진 존재로 그려지며 복잡한 감정을 일으킨다. 때로는 ‘이 캐릭터를 미워해야 하나, 동정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입체적이다.
명확한 한계와 논란...칼날 위의 줄타기
동시에 이 지점이 이 작품의 한계와 논란을 낳기도 한다. 폭력의 미학화, 여성 캐릭터의 소비 방식, 때로는 작가가 던지는 사회적 메시지가 다소 단편적이거나 피상적으로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기 때문이다. 멋지게 주먹을 휘두르는 장면, 근육질 남자들이 상반신을 벗고 싸우는 장면은 분명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하지만, 그만큼 폭력을 '쿨한 것'으로 포장하는 위험도 있다. 마치 '타이트 파이트 클럽'의 브래드 피트처럼, 피범벅이 된 얼굴조차 미학적으로 그려지는 순간들 말이다. 여성 캐릭터는 주요 인물들 외에는 기능적으로 소비되거나, 누군가의 동기 부여를 위한 도구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도 있다.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작품 자체가 외모와 몸의 서열화를 재생산하고 있다는 아이러니는 이 웹툰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비판과 재생산 사이의 줄타기는 많은 대중문화 작품들이 직면하는 딜레마이기도 하다.

연재가 길어지면서 생긴 피로감도 있다. 초반 학원물–중반 조직·격투–후반 글로벌 비즈니스·음모 구조로 갈수록 스케일은 커지지만, 그만큼 처음의 날것 같은 생활감이 옅어진다는 평가가 있다. 독자 입장에서는 ‘도대체 언제쯤 박형석 개인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오나’라는 갈증이 생기기도 한다. 인물도 점점 늘어나서, 어느 순간부터는 새로운 캐릭터가 등장할 때 기억하기가 벅찰 정도다. '원피스'처럼 캐릭터 도감이 필요한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충분히 그런 느낌이 드는 순간들이 있다. 이런 점은 장기 연재작의 숙명에 가깝지만, '외모지상주의' 역시 그 덫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는 분명하다. 먼저, 독자층의 감정에 정확히 꽂히는 지점을 알고 있는 웹툰이라는 점이다. 못생겼다는 이유로, 가난하다는 이유로,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무시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박형석의 첫 화를 보는 순간 "아, 이건 내 이야기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 후에 이어지는 화려한 액션과 성장담, 친구들과의 유대는 일종의 보상 판타지다. 현실에서는 바뀌지 않는 수많은 것들이, 이 웹툰 안에서는 최소한 바뀔 가능성을 가진 채 그려진다. 신데렐라가 왕자를 만났다면, 박형석은 또 다른 자기 자신을 만난 셈이다.
또 하나는, '외모지상주의'가 한국 10~20대 남성 문화의 일부분을 거의 생생한 스냅샷처럼 담아냈다는 점이다. 패션, 말투, 게임과 SNS, 유튜브와 스트리밍, 아이돌과 힙합, 헬스장과 다이어트 문화까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청소년 문화의 디테일을 빠르게 흡수해 세계관 안에 녹여낸다. 이 작품을 오래 따라간 독자라면, "아, 이때는 이런 유행이었지" 하는 감각까지 떠올릴 수 있을 정도다. 마치 '응답하라' 시리즈가 특정 시대의 감각을 소환하듯, 이 웹툰도 2010년대 중후반 한국 청소년 문화의 타임캡슐 같은 역할을 한다.

학원 액션물이나 싸움 웹툰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거의 필수 코스에 가깝다. 캐릭터 수가 많고 떡밥도 복잡하지만, 그만큼 파고들수록 재미 요소가 많다. 싸움 장면의 연출과 캐릭터들의 케미만으로도 한동안은 충분히 몰입할 수 있다. '더 파이터', '헬퍼', '싸움독학' 같은 웹툰을 재밌게 본 독자라면 이것도 취향 저격일 가능성이 높다.
외모와 계급, 청소년기의 서열 문화에 대해 고민해 본 적 있는 사람에게도 '외모지상주의'는 흥미로운 텍스트가 된다. 비판적으로 보더라도, 이 웹툰이 어떻게 독자의 욕망과 콤플렉스를 건드려왔는지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까지 인기였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작품 안에서 찾아보는 과정이 꽤 의미 있다. 미디어 연구자나 문화평론가 지망생이라면, 이건 거의 필독 텍스트에 가깝다.
본인이 10~20대일 때 이 작품을 즐겨봤다면, 지금 다시 읽으면 조금 다른 감정이 올라올 것이다. 예전에 순수하게 '사이다'로 느꼈던 장면에서, 이제는 씁쓸함이나 불편함이 느껴질 수도 있다. 그 감정의 변화 자체가, 내가 어떤 어른이 되어 왔는지 보여주는 잣대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외모지상주의'는 단순한 흥행 웹툰을 넘어, 한 세대의 욕망과 상처를 압축해 놓은 하나의 거대한 기록물에 가깝다. 그 기록을 끝까지 따라가 볼 마음이 있다면, 이 웹툰은 여전히 충분히 볼 만한, 그리고 여러모로 생각거리를 남기는 작품이다.
결국 '외모지상주의'는 우리 사회가 외모에 부여하는 의미를 확대경으로 들여다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두 개의 얼굴로 살아가는 박형석의 이야기는, 어쩌면 우리 모두가 겪는 이중생활의 은유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집에서의 나와 밖에서의 나, SNS의 나와 현실의 나 사이를 오가며 산다. 그 틈새에서 느끼는 괴리와 모순을 이 웹툰은 극대화시켜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판타지이면서도 리얼리즘이고, 오락이면서도 고발이며, 웃음을 주면서도 눈물을 짜낸다. 그런 복합적인 감정 위에서, 우리는 여전히 질문한다. "진짜 나는 어디에 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박형석은 아직도 찾아가는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