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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아픔을 사랑으로 치유한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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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르기에 끌리는 ‘N극·S극’ 제15회 서울드라마어워즈 한류드라마 연기자상 수상작

[KAVE=이태림 기자] 서울의 초고층 빌딩 숲 위로 바람이 분다. 재벌가 막내딸이자 패션·뷰티 브랜드의 대표 윤세리(손예진)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미란다 프리슬리처럼 늘 하늘 위를 걷는 사람처럼 살아왔다. 가족과는 냉냉하게, 돈과 성과로만 평가받는 삶. 어느 날, 새로 내놓을 레저 브랜드를 위해 패러글라이딩 시범을 나선 세리는, 그야말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겪는다.

예고 없이 몰아친 돌풍에 휘말려 조종을 잃고, 정신없이 휘청이던 그녀는 나무숲 어딘가에 거꾸로 매달린 채 눈을 뜬다. '오즈의 마법사'의 도로시가 토네이도에 휩쓸려 오즈로 갔다면, 세리는 돌풍에 휩쓸려 북한으로 간다. 다만 도로시에게는 토토라는 강아지가 있었지만, 세리에게는 명품백 하나와 깨진 휴대폰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앞에, 총을 든 군복 차림의 남자가 서 있다. 이름은 리정혁(현빈). 북한 군부대 소속 장교, 게다가 꽤 잘나가는 집안의 아들이다. '노팅힐'에서 평범한 서점 주인이 할리우드 스타를 만났다면, 여기서는 북한 군인이 남한 재벌을 만난다. 다만 노팅힐보다 훨씬 더 복잡한 국제 정세가 걸려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

세리는 자신이 국경을 넘었다는 사실을 즉각 깨닫는다. 대한민국 상속녀가, 아무 준비 없이, 신분증도 없이, DMZ를 건너 북한 땅 깊숙이 떨어진 것이다. 이 상황을 설명해줄 매뉴얼은 그 어디에도 없다. '베어 그릴스'의 서바이벌 프로그램도 이런 시나리오는 다루지 않았다. 남한 재벌가의 후계 싸움도, 고급 브랜드 론칭도 순식간에 의미를 잃는다.

세리는 우선 살아남고, 발각되지 않고, 다시 돌아갈 방법부터 찾아야 한다. '본 시리즈'의 제이슨 본이 기억을 잃고 유럽을 떠돌았다면, 세리는 신분을 숨기고 북한을 떠돌아야 한다. 정혁은 처음에는 이 '불시착 여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해한다. 체제의 적국 국민이자, 엄밀히 말해 불법 침입자. 하지만 세리가 이곳의 언어와 생활 방식에 어설프게 적응해보려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규정과 양심 사이에서 갈등한다.

21세기판 '로마의 휴일'

정혁은 결국 세리를 자신의 집으로 숨긴다.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이 기자의 집에 머물렀다면, 여기서는 재벌 상속녀가 북한 군인의 집에 머문다. 장교의 관사, 그리고 그가 속한 조그마한 농촌 마을은 한순간에 이방인을 위한 은신처가 된다. 문제는, 이 마을 사람들의 눈은 '셜록 홈즈'의 추리력만큼이나 결코 둔하지 않다는 점이다.

동네 아줌마들의 촉은 국정원 못지않고, 아이들은 낯선 사람을 금방 눈치 챈다. 세리는 저녁마다 전기가 나가고, 시장 물건은 줄 서야 겨우 살 수 있고, 인터넷도, 카드 결제도 없는 생활에 내던져진다. '캐스트 어웨이'의 톰 행크스가 무인도에서 살았다면, 세리는 시간여행이라도 한 것처럼 1990년대로 돌아간 듯한 생활을 한다.

평소 같았으면 건성으로 지나쳤을 TV 속 북한의 모습이, 지금은 숨을 죽이고 버텨야 하는 현실이 된다. 그러면서도 '데블 위어스 프라다'의 앤디처럼 특유의 재치와 빨랫줄 같은 생존력을 발휘해, 이 묘한 마을 속에 조금씩 스며든다.

정혁과 세리 사이에는 애초부터 국경보다 높은 벽이 놓여 있다. 체제, 이념, 가족, 신분, 서로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의 불균형까지. '로미오와 줄리엣'의 몬태규 가문과 캐플렛 가문의 갈등이 귀여워 보일 정도다. 하지만 드라마는 이 둘이 서로의 세계를 '관광'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들여다보게 만드는 데 시간을 쓴다.

세리는 동네 아줌마들과 김장을 담그고, 밤마다 장마당에서 밀수품을 사오는 풍경을 보며, 자신이 '뉴스에서 소비하던 북한'과 '실제로 숨 쉬는 사람들의 북한'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걸 체감한다.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이 1920년대 파리를 동경했다가 실제로 가보고는 환상이 깨진 것처럼, 세리도 북한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진다.

정혁은 세리를 통해 자본주의 도시의 속도를 간접 경험하면서도, 남한 사회의 냉혹함과 고립감 역시 보게 된다. 점점 둘 사이의 대화는 "어디가 더 좋은가"를 따지는 논쟁이 아니라,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얼마나 외로웠는가"로 흘러간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제시와 셀린이 비엔나 거리를 걸으며 서로를 알아가듯, 세리와 정혁도 북한 마을 골목을 걸으며 서로를 알아간다.

물론 로맨스는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세리를 지키기 위해 상부의 감시와 내부 정치 싸움까지 감수하는 정혁, 그런 그에게서 오랜만에 '조건 없는 편'이 생겼다고 느끼는 세리. '타이타닉'의 잭이 로즈에게 "나를 믿어"라고 말했듯, 정혁도 세리에게 "내가 지켜줄게"라고 말한다. 다만 잭에게는 침몰하는 배가 적이었다면, 정혁에게는 두 나라 전체가 적이다.

이 감정선의 주변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배치된다. 정혁을 견제하는 상관,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채고도 모른 척 거들어주는 부대원들, 세리의 정체를 의심하면서도 끝내 동네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아줌마들. '프렌즈'의 센트럴 파크 친구들처럼, 이들은 서로를 지키는 공동체가 된다.

한편 남한에서는 세리의 실종을 둘러싼 재벌가의 권력 다툼이 벌어진다. 세리의 형제들은 '왕좌의 게임'의 왕좌를 차지하려는 가문들처럼 '사라진 막내'를 걱정하기보다, 빈자리를 어떻게 차지할지 계산하는 데 더 바쁘다. 남한의 화려한 빌딩과 북한의 소박한 마을이 번갈아 등장하며, 두 세계의 대비가 '파라사이트'의 반지하와 고급 주택만큼이나 쨍하게 그려진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위기는 커진다. 세리의 존재를 노리는 다른 세력, 북한 내부 권력 싸움, 남한에서 세리를 찾는 이들의 발걸음이 동시에 좁혀온다. 서로를 지키기 위해 내릴 수 있는 선택지는 점점 좁아지고, 국경과 체제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이 사랑의 물리적인 벽으로 점점 무게를 더한다.

드라마는 결말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둘을 갈라놓을 듯, 다시 붙여놓을 듯 긴장감을 조절한다. '노트북'의 노아와 앨리가 사회적 신분 차이로 갈라졌다면, 세리와 정혁은 국경으로 갈라진다. 최종적으로 둘이 어떻게 '국경과 사랑' 사이에서 답을 찾아가는지는 여기서 더 말하지 않겠다. '사랑의 불시착'의 마지막 장면들은, '식스 센스'의 반전만큼이나 스포일러 한 줄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공들여 쌓아올린 감정의 결이 있다.

대담함과 섬세함의 동거...두 세계의 색감 차이

'사랑의 불시착'의 작품성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언급하게 되는 건 설정의 대담함과 섬세함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남한 재벌 상속녀와 북한 군인이 사랑에 빠진다는 발상은 자칫하면 '스타워즈'의 제다이와 시스가 사랑에 빠지는 것만큼이나 가볍게 소비되거나, 정치적 논란에 휩싸이기 딱 좋은 소재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철저히 '멜로드라마'의 문법 안에서, 정치보다 사람을 먼저 전면에 세운다. 북한은 이념 교육의 대상이 아니라, 동네 아줌마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다 떨고, 아이들이 축구를 하고, 군인들이 라면을 끓여 먹는 공간으로 그려진다. '리틀 포레스트'의 일본 시골이나 '토토로'의 1950년대 일본 마을처럼,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공간으로 재구성된다.

물론 현실보다 훨씬 낭만화되고, 안전한 버전의 북한이다. 하지만 그 덕분에 시청자는 '적'이나 '공포'가 아니라, '이웃'과 '타지의 동네'라는 감각으로 북쪽을 받아들이게 된다. '아멜리에'가 파리를 동화 같은 공간으로 그렸듯, '사랑의 불시착'도 북한을 로맨스가 가능한 공간으로 그린다.

연출과 미장센도 이 기획을 뒷받침한다. 평양과 마을 장면은 철저히 세트와 해외 촬영으로 구성되지만, 색감과 구조 덕분에 독자적인 판타지 공간처럼 느껴진다. 어두운 초록과 갈색 톤이 주를 이루는 북한 마을, 회색빛 콘크리트와 붉은 깃발이 어우러진 평양, 반대로 서울은 유리와 네온, 흰 조명으로 가득한 공간으로 그려진다.

이 대비는 단순한 '빈부 격차' 표현이 아니라, 각 캐릭터의 내면 온도와 연결된다.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색감이 디스토피아를 표현했다면, '사랑의 불시착'의 색감은 두 세계의 차이를 표현한다. 세리가 점점 마을에 스며들면서 화면의 색감도 조금씩 물러나고, 정혁이 남한에 발을 디딜 때의 낯섦은 과하게 반짝이는 조명으로 표현된다.

대사와 유머도 '사랑의 불시착'을 떠받치는 중요한 축이다. 북한 사투리와 남한 표준어, 재벌가 특유의 냉소적인 말투가 부딪히며 자연스럽게 웃음을 만든다. 정혁 부대원들이 한국 드라마와 치킨, 편의점 문화에 푹 빠지는 장면, 세리가 아줌마들에게 패션·뷰티를 전도하듯 가르치는 장면들은, 체제와 문화를 가볍게 교차시켜 관객에게 '이질감' 대신 '친근한 차이'를 선물한다.

'마이 빅 팻 그리스 웨딩'이 그리스계 이민자 가족의 문화를 유머로 풀어냈듯, '사랑의 불시착'도 남북의 문화 차이를 유머로 풀어낸다. 이 유머 덕분에, 남북이라는 무거운 소재가 지나치게 무거워지지 않고, 멜로드라마의 리듬이 유지된다. '프렌즈'가 일상의 소소한 웃음으로 20년을 버텼듯, '사랑의 불시착'도 문화 차이의 소소한 웃음으로 긴장을 완화한다.

배우들의 호흡은 이 모든 장치를 현실로 끌어내리는 핵심 장치다. 손예진이 연기하는 윤세리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앤디나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처럼 전형적인 재벌 상속녀 캐릭터에 갇히지 않는다. 허영심 많고 도도하지만, 동시에 놀라울 만큼 성실하고 생존력 강한 인물이다.

북쪽 마을에 떨어져서도 "나는 원래 잘난 사람"이라는 자기 확신과 "그래도 지금은 이 사람들한테 배워야 한다"는 유연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현빈의 리정혁은 군복판에 서 있는 무뚝뚝한 장교이지만, 사랑 앞에서 서툴고 진지하게 굳어버리는 인물이다. '센스 앤 센서빌리티'의 브랜든 대령이나 '오만과 편견'의 다아시처럼, 절제된 감정 표현은 오히려 더 큰 울림을 준다.

그의 절제된 감정 표현은, 과장된 멜로의 틀 안에서도 설득력을 유지하게 만든다. 특히 둘의 눈빛과 호흡이 오가는 장면들은, 별다른 대사 없이도 "아, 이 둘은 이미 서로에게 깊이 빠졌구나"를 체감하게 만든다. '노팅힐'의 휴 그랜트와 줄리아 로버츠, '어바웃 타임'의 도널 글리슨과 레이첼 맥아담스만큼이나 완벽한 케미스트리.

K-드라마의 집대성, 판타지의 정치학

대중적 사랑의 이유를 조금 더 구조적으로 보자면, '사랑의 불시착'은 한국 드라마가 오랫동안 축적해온 장점들을 '마블 유니버스'의 크로스오버처럼 '합본선'처럼 모아놓은 작품이다. 재벌·상속·가족 갈등이라는 익숙한 코드, 군복과 조직이라는 남성 서사, 아줌마들의 연대와 수다가 만들어내는 생활극, 여기에 남북 분단이라는 한국적 특수성이 얹어진다.

각 요소만 놓고 보면 다소 진부할 수 있는 장치들이, '불시착'이라는 판타지 상황에 올려지면서 한 번 더 새롭게 보인다. 게다가 스위스·몽골 등 해외 로케이션이 주는 스케일감 덕분에, 시청자는 멜로드라마를 보면서도 '어바웃 타임'이나 '미드나잇 인 파리'처럼 '여행하는 기분'을 함께 맛본다.

물론 비판 지점도 존재한다. 북한의 현실이 지나치게 로맨틱하게 그려졌다는 지적, 북 주민들의 생활고와 정치적 억압이 '스튜디오 지브리' 애니메이션처럼 희화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 남북 대립 현실을 잊게 만드는 판타지라는 비판 등은 충분히 유효하다.

그러나 작품은 애초에 '정치 드라마'보다는 '국경을 넘은 로맨틱 코미디'에 가깝다는 점을 분명히 해둔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사랑의 불시착'은 분단 현실을 가볍게 소비하는 대신, "어떤 체제에 속해 있든 사랑하고 웃고 싸우는 사람들의 감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메시지에 힘을 싣는다. '인 더 무드 포 러브'가 1960년대 홍콩을 낭만화했듯, '사랑의 불시착'도 현재의 북한을 낭만화한다.

이 방향성이 모든 시청자에게 편안하게 받아들여지진 않겠지만, 적어도 작품 내에서 스스로의 역할을 일관되게 수행하고 있다는 건 부인하기 어렵다.

발칙한 상상력에 매력을 느낀다면

'멜로드라마는 너무 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가끔은 마음을 푹 담가보고 싶은 사람에게 잘 맞을 작품이다. '사랑의 불시착'은 클리셰를 알고도, 그 클리셰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작품이다. '노트북'이나 '어바웃 타임'처럼 우연, 운명, 재회, 오해와 화해 같은 장치들이 줄줄이 등장하지만, 대부분의 순간에 시청자는 "알면서도 좋다"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잘 만든 장르물의 힘이다.

또, 남북 문제를 뉴스 헤드라인과 정치 구호로만 접해온 사람이라면, 이 드라마를 통해 아주 다른 방식의 '분단 감각'을 경험해볼 수도 있다. 물론 여기서 그려지는 북한은 현실과 다르다. 그러나 그 과장과 변형을 통해 오히려 "저쪽에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있겠지"라는 상상력을 자극한다. '토토로'를 보며 1950년대 일본 시골을 동경하게 되듯, '사랑의 불시착'을 보며 다른 체제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다.

이런 상상이 조심스럽게 유지될 때, 드라마는 단지 즐거운 사랑 이야기 이상의 잔상을 남긴다.

마지막으로, 현실에서 해결할 수 없는 장벽들 앞에서 자주 마음이 작아지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불시착'을 권하고 싶다. 이 작품을 본다고 해서 현실의 장벽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다만 한동안 잊고 있던 질문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그래도, 이 모든 걸 감수하고 선택할 만한 감정이 내 안에 아직 남아 있을까?"

'타이타닉'의 로즈가 "You jump, I jump"라고 말했듯, '사랑의 불시착'도 "당신이 어디든 나도 간다"고 말한다. 정답은 각자 다르겠지만, 그 질문을 한 번쯤 정면으로 마주해보는 것만으로도, 이 드라마는 제 역할을 다한다고 느껴질 것이다.

화면 속 세리와 정혁이 국경선 위를 아슬아슬하게 오갈 때, 시청자는 각자 자신의 '선'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그 선을 넘을 용기도, 넘지 않을 용기도 모두 사랑의 다른 얼굴이라는 사실을 조심스레 이해하게 된다. 그런 종류의 이야기가 필요하다면, '사랑의 불시착'은 여전히 유효한 선택이다.

2019년 말 방영 시작 후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가, '기생충'과 함께 K-콘텐츠의 가능성을 입증했다. 이 드라마는 단순히 잘 만든 로맨스가 아니라, 분단이라는 한국의 특수성을 보편적 사랑 이야기로 번역해낸 문화적 사건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전 세계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이 드라마를 보며 38선을 넘는 사랑을 꿈꾸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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