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날 갑자자 학교에서 체벌이 사라진 뒤, 복도와 교실을 채운 것은 평화가 아니라 묘한 무질서다. 교사는 학생의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리고, 학생은 선생님을 대놓고 조롱해도 별일 없다는 걸 일찌감치 배운다. 학부모는 민원이라는 이름의 칼을 쥐고 학교를 압박하고, 교장은 숫자와 평가표만 바라본 채 갈등을 덮어두기에 급급하다. 네이버 웹툰 '참교육'은 바로 이 뒤틀린 풍경 속으로 한 명의 '현장 해결사'를 들이박는 작품이다. 마치 서부 영화 속 총잡이가 무법천지가 된 마을에 말을 타고 들어오듯, 정장을 입은 한 남자가 교실 문을 연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교육부 산하의 비밀스러운 조직, 교권보호국이 있다. 서류와 공문, 회의실 설득으로는 더 이상 교권을 지킬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이들은 직접 학교 현장에 뛰어들어 교사의 권리를 지켜 주는 특수팀을 만든다. 일종의 '교육계 특수기동대'랄까. 그 선봉에 선 인물이 나화진이다. 말수가 많은 편도 아니고, 겉보기엔 평범한 공무원처럼 보이지만, 문제 상황이 드러나는 순간 그의 눈빛은 전혀 다른 기류로 바뀐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담배 물고 눈 가늘게 뜨는 그 순간과 비슷한 긴장감이랄까.
정의의 철퇴, 혹은 교실에 내려온 심판
웹툰의 기본 구조는 철저하게 에피소드형이다. 매번 다른 학교, 다른 사건이 독립된 에피소드로 등장한다. 어느 학교에서는 교실을 장악한 일진이 선생님을 대놓고 협박하고, 또 다른 학교에서는 교장과 학부모, 학원장이 한 통속이 되어 성적 장사를 벌인다. 어떤 에피소드에서는 선생님이 성희롱 가해자로 몰리는 순간, 그 배후에 학생과 어른들의 이해관계가 촘촘히 얽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런 곳으로 나화진은 교육청 조사관, 기간제 교사, 재단 실사단 등 다양한 신분을 바꿔가며 잠입한다. 007이 제임스 본드라면, 이쪽은 제임스 교권이랄까.
처음에는 그는 친절한 미소와 정중한 말투로 학교를 둘러본다. 복도에서 학생들을 관찰하고, 교무실에서 잡담을 듣고, 교장실에서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면서 분위기를 파악한다. 마치 미슐랭 가이드 조사원이 음식점을 평가하듯 조용히 관찰한다. 그러나 가해자와 방관자의 민낯이 드러나는 순간, 나화진의 태도는 급격히 달라진다. 억눌려 있던 분노가 아니라, 엄청난 폭력을 기계적으로 집행하는 느낌에 가깝다. 그가 교실 문을 닫고 타깃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순간, 독자들은 무엇을 기다려야 할지 이미 알고 있다. 바로 이 웹툰의 전매특허인 '참교육'의 시간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나화진의 방식은 말 그대로 물리력이다. 교사를 집단으로 조롱하던 학생들을 책상에 처박고, 학폭을 은폐하고 피해자를 몰아세운 교장은 벽으로 내동댕이쳐진다. 자기 아이의 입시를 위해 다른 학생들의 인생쯤은 희생해도 된다고 믿는 학부모는 그 자리에서 자존심과 체면을 몽땅 부서뜨리는 응징을 당한다. 현실에서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장면들인데, 웹툰은 이를 만화적 과장과 타격감 넘치는 액션으로 쾌감 있게 구현해낸다. 독자는 이 장면에서 일단 속이 시원해진다. 마치 막힌 배수구가 뻥 뚫리는 느낌이랄까. 아니면 오랫동안 참았던 재채기가 터지는 순간 같은 해방감.
하지만 나화진이 혼자 싸우는 것은 아니다. 그의 곁에는 같은 교권보호국 소속 감독관 임한림이 있다. 나화진이 칼끝이라면, 임한림은 그 칼이 완전히 미쳐 날뛰지 않도록 겨우 잡아주는 손에 가깝다. 그는 피해 학생의 사정을 조금 더 들어보자고 말하고, 폭력 대신 제도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한다. 두 사람이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 차이는 작품 전체에 미묘한 긴장감을 부여한다. 독자는 이 둘의 대화를 통해 '맞은 만큼 돌려주는 것이 정의인가, 아니면 그래도 교육은 사람을 바꾸는 일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배트맨과 슈퍼맨의 도덕적 대립을 교무실 배경으로 옮겨 놓은 셈이다.
연재가 이어질수록 에피소드의 스케일은 점점 커진다. 초반에는 학폭 가해자와 교사, 학부모 사이의 갈등 정도에 머물렀다면, 이후에는 교육청, 정치권, 재단 이사진, 언론까지 전선이 확장된다. 교권보호국 자체도 더 이상 완전히 정의로운 조직으로만 그려지지 않는다. 위에서 주어지는 압박과 실적 경쟁,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조직 내부의 균열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여기에 과거 교권보호국과 맞섰던 청소년 인권 변호사 이준빈이 새롭게 합류하면서, '참교육'은 단순한 학원 액션에서 한 단계 더 복잡한 가치 충돌의 장으로 변모한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처럼 세계관이 확장되는 건데, 다만 이쪽은 교실에서 시작해 청와대까지 가는 여정이다.
에피소드의 결말은 대체로 비슷한 패턴을 따른다. 가해자는 자신의 권력과 체면을 잃고 무너지고, 피해자는 최소한의 명예와 안전을 되찾거나 새로운 학교, 새로운 시작을 얻는다. 나화진과 임한림, 동료들은 다음 학교를 향해 떠난다. 마치 '도망자' 시리즈처럼 한 곳의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이 반복 속에서 조금씩 다른 결이 섞인다. 어떤 에피소드에서는 나화진의 선택이 과했다는 문제 제기가 등장하고, 또 어떤 이야기는 '가해자'로 보였던 인물의 처지를 뒤늦게 드러내며 독자의 감정을 흔든다. 결말의 방향 자체는 큰 범주에서 예측 가능하지만,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물들의 서사와 갈등이 이야기의 힘을 만든다.
속도와 쾌감의 미학, 그 이면의 불편함
'참교육'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는 무엇보다 속도감이다. 작품은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처음 몇 컷 안에 누가 힘을 쥐고 있는지, 누가 피해자인지, 어떤 부조리가 작동하고 있는지 명료하게 보여준다. 마치 숙련된 요리사가 칼질 세 번으로 재료를 정리하듯 깔끔하다. 그다음부터는 거의 롤러코스터다. 말로 변명하려 들고, 법과 인권, 제도라는 단어 뒤에 숨으려는 가해자의 모습이 클로즈업되는 순간, 독자는 이미 알고 있다. 곧 누군가가 교실 바닥을 박차고 날아오를 것이고, 책상이 부서질 것이고, 말로는 통하지 않던 문제가 힘의 언어로 뒤집힐 것이다. 기대와 충족 사이의 시간이 짧다. 이게 바로 쾌감의 공식이다.
작화와 연출은 이 속도감과 쾌감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설계된다. 인물들의 동세는 과감하고, 타격의 순간을 담는 화면은 거의 '한 장면으로 액션을 요약하는 포스터'처럼 구성된다. 종종 교실 천장이 찢어질 듯한 앵글, 바닥이 기울어진 듯한 왜곡된 원근감을 활용해 권력 관계의 뒤집힘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평소에는 담담하던 나화진의 표정이 조금만 굳어져도, 독자는 그 칸을 일종의 신호처럼 읽는다. '이제 참교육이 시작된다'는 합의가 작가와 독자 사이에 암묵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셈이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우리는 그 표정만 봐도 침을 꿀꺽 삼키며 다음 장면을 기다린다.

서사적으로도 이 작품은 단순함과 복잡함 사이에서 교묘하게 줄타기를 한다. 기본 틀이 '악한 어른 혹은 학생 등장 – 피해자 등장 – 조사 – 응징'이라는 익숙한 공식을 따르기 때문에, 독자는 구조를 이해하는 데 에너지를 많이 쓰지 않아도 된다. 마치 시트콤의 정해진 구조처럼, 익숙함이 주는 안정감이 있다. 그 대신 집중해야 할 지점은 각 에피소드가 드러내는 현실의 디테일이다. 학폭 가해자 뒤에 숨어 있는 학부모의 갑질, 학교의 평가를 위해 사건을 축소하려는 교감과 교장, 학생의 휴대전화 한 통과 SNS 게시물이 교사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리는 구조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작가는 이 구체적인 디테일을 통해 한국 교육이 어떤 구조적 피로 위에 서 있는지 보여준다. 뉴스에서 본 것 같은 사건, 지인에게 들은 것 같은 이야기가 만화 칸 안에 고스란히 들어 있다.
흥미로운 점은, '참교육'이 가해자와 피해자를 완전히 흑백으로 나누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순간들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어떤 에피소드에서는 폭력의 중심에 서 있던 학생의 집안 상황이 드러나고,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교사가 그동안 학생을 어떻게 대했는지가 늦게 밝혀지며 독자의 시선이 뒤집힌다. 물론 전체적으로 보면 이 작품은 여전히 '통쾌한 한 방'을 우선시하는 쪽에 가깝다. 그럼에도 단순한 복수극이 아니라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폭력의 계보'를 너비 있게 보여주려는 시도가 눈에 띈다. 선과 악의 경계선에 희미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순간들이 있고, 바로 그 순간 이 웹툰은 단순한 액션물 이상의 무게를 획득한다.
사이다의 쾌감과 현실의 괴리
이 웹툰이 대중적 사랑을 받는 이유는 너무나 직관적이다. 현실에서 우리가 봐 온 뉴스와 댓글 창에서는 늘 가해자와 권력자가 승리하는 듯 보였다. 선생님이 억울하게 욕을 먹고 사직서를 내고, 피해 학생이 전학을 가야 했으며, 학부모와 교장은 사과 한마디 없이 사건을 덮고 넘어갔다. '참교육'은 이 모든 장면을 정반대로 뒤집는다. 그동안 속으로만 떠들어 보던 '그래서 한 번만 제대로 혼 좀 나봐라'라는 상상이, 이 만화 안에서는 실제 화면으로 구현된다. 독자가 느끼는 카타르시스는 여기서 나온다. 현실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대리 만족시켜 주는 판타지인 셈이다. 마치 복권 당첨을 상상하며 사는 것처럼, 나화진의 주먹은 우리가 실현할 수 없는 정의를 대신 실현해 준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논쟁거리이기도 하다. '참교육' 속 폭력은 분명히 이야기 안에서 '정의로운 응징'으로 포장되어 있다. 다만 그 수위가 만화적 과장을 넘어선다 싶을 만큼 세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교육이란 이름이 새삼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폭력을 끊기 위해 폭력을 사용한다'는 논리가 그대로 재현되는 셈이라, 실제 교육 현장에서 몸부림쳐 온 사람들에게는 불편함을 줄 수밖에 없다. 교육이란 본디 가장 느리고 지난한 과정인데, 이 웹툰은 주먹 몇 방으로 모든 걸 해결한다. 더구나 가해자의 사정이 충분히 조명되지 않은 에피소드에서는, 한 사람의 존재 전체를 '맞아도 싸다'는 대상으로 축소해 버리는 위험도 딸려온다. 폭력의 정당성이란 언제나 미끄러운 언덕 위에 있다. 한 발만 잘못 디디면 그대로 굴러떨어진다.

작품이 중후반으로 갈수록 나화진의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는 캐릭터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교권보호국 내부의 정치, 언론과 여론의 압박이 서사에 깊게 개입하면서, 작가도 이런 고민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나화진 스스로 자신의 행동이 어디까지 정당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순간들이 늘어나고, 때로는 그가 내린 선택이 예상치 못한 2차 피해를 낳기도 한다. 이때 독자는 단순한 통쾌함을 넘어, '내가 지금 즐겁게 보고 있는 이 폭력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되묻게 된다. 그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였다면 더 단단한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다만, 이 질문과 초반부의 사이다 액션이 균형을 이루느냐에 대해서는 독자마다 평가가 갈릴 여지가 크다. 어떤 이에게는 성숙한 진화로, 어떤 이에게는 초심을 잃은 방황으로 보일 수 있다.
카타르시스를 찾는 자들을 위한 안내서
마지막으로, 이 웹툰을 어떤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은지 이야기하며 마무리해 보자. 학교와 교육 관련 뉴스를 볼 때마다 속이 답답해지지만, 현실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고 느껴지는 사람에게 '참교육'은 강력한 감정 배출구가 될 가능성이 크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한 번만이라도 이렇게 통렬하게 되갚아 주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면, 나화진이 교실 문을 닫는 장면마다 묘한 해방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마치 펀칭백을 실컷 두들겨 패고 나서 느끼는 후련함처럼, 대리 만족의 쾌감이 손끝까지 전해진다.
반대로 폭력 묘사에 민감하거나, 실제 학교 폭력, 체벌의 상처를 가지고 있는 독자라면 이 작품이 다소 거칠게 다가올 수 있다. 아무리 악인에게 향하는 폭력이라도, 반복적으로 소비되는 화면 자체는 피로를 야기한다. 그 피로를 감수하고서라도 지금의 교육 현실에 대해 다른 각도의 상상을 해보고 싶다면, '참교육'은 한 번쯤 거쳐 볼 만한 작품이다. 읽고 나면, 적어도 교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예전처럼 가볍게 넘기기는 어려워진다.
또한 장르물의 관습과 현실 고발의 메시지가 어떻게 충돌하고 섞이는지 관찰하고 싶은 이들에게도 흥미로운 텍스트가 된다. 이 웹툰은 완벽하지 않다. 오히려 그 불완전함이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주먹으로 정의를 실현하는 판타지를 즐기면서도, 동시에 그 판타지의 한계를 의식하게 만드는 이중성. 그 불편함을 끌어안고 한동안 생각을 계속하게 한다는 점에서, 이 웹툰은 아주 한국적인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는, 논쟁적인 문제작으로 남는다. 결국 우리가 나화진의 주먹을 응원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력감도 함께 들여다보게 된다. 그리고 그 성찰의 순간이야말로 이 작품이 남기는 가장 의미 있는 유산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