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을 뜨면 이미 전쟁이 시작된 뒤다.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은 왕과 신하가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이 아니라, 사실상 "이미 망한 판 한가운데에 던져진" 인물들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막을 연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전횡 속에서 꼭두각시처럼 왕위에 올랐다가 쫓겨난 목종,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뜻하지 않게 황제가 되어버린 대량원군 왕순, 훗날 현종이 되는 인물이다.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어린 황제의 눈에는 궁궐 정치가 복잡한 장기판 아니, 차라리 룰을 모르는 체스판처럼 보일 뿐이고, 자신을 지켜줄 사람도, 믿을 수 있는 기반도 없다. 그런 현종 앞에, 거란 40만 대군이 침략해 온다는 소식이 폭탄처럼 떨어진다.
신하들은 하나같이 겁에 질려 입을 봉인한다. 전쟁을 피하자, 강화를 통해 체면만이라도 지키자, 개경을 버리고 남쪽으로 몽진하자는 의견이 폭포처럼 쏟아진다. "백성을 버리고 떠나야 목숨을 건질 수 있다"는 말들이 어전 회의를 뒤덮는 순간, 오로지 한 사람만이 반대 방향으로 목소리를 높인다. 변방으로만 떠돌던 늙은 문신, 강감찬이다. 그는 "왕이 버린 나라는 아무도 지키지 않는다"며, 끝까지 개경을 지키고 거란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치 난파선에서 유일하게 "배를 버리지 말자"고 외치는 선장처럼. 다수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철저히 논리와 신념으로 승부를 거는 인물. 이 순간, 드라마는 앞으로 이어질 왕과 재상의 관계를 정확하게 규정한다. 겁에 질린 어린 황제와, 그 옆에서 입을 굳게 다문 채 버티는 노신.
1차 침입 이후 고려가 어렵게 거란과 휴전을 맺고 평화를 모색하는 동안에도, 내부는 편치 않다. 강조의 정변으로 왕이 바뀌고, 천추태후와 김치양 세력, 군권을 쥔 강조, 새 황제 현종 사이에서 미세한 긴장이 이어진다. 흔히 대하사극에서 보던 '위대한 영웅의 일대기'가 아니라, 이 드라마의 초반은 한마디로 말해 "정권이 붕괴 일보 직전인 나라의 어수선한 공기"를 천천히, 그러나 집요하게 쌓아 올리는 시간이다. 목종 폐위 과정, 강조의 난, 천추태후 세력의 몰락은 빠르게 지나가지만, 그 뒤에 남은 것은 무너진 신뢰와 공포뿐이다. 그 위에 전쟁이 덮쳐 온다.
2차 여요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화면의 톤도 급변한다. 개경을 향해 밀려오는 거란 기병의 물결이 말을 몰아 먼지를 일으키며 질주하는 군사들, 불타는 성벽과 허겁지겁 피난길에 오른 백성. 전쟁은 결코 영웅 몇 명의 화려한 무대가 아니라,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의 삶을 파괴하는 재난이라는 사실을 드라마는 반복해서, 끈질기게 상기시킨다. 개경을 지킬 것인가, 버릴 것인가의 기로에서, 현종은 결국 백성과 궁궐을 뒤로한 채 몽진을 택한다. 이 선택은 이후 내내 그의 가슴에 남는 상처이자 숙제, 아니 저주처럼 따라다닌다. 강감찬은 그런 황제 곁을 떠나지 않는다. 도망치는 왕을 따르는 것을 비겁하다고 여기는 시선도 있지만, 그는 ‘전쟁은 왕을 살리는 게 아니라 나라를 살리는 것’이라 믿으며 냉철하게 상황을 분석한다.
3차 침입 국면에 이르면, 이야기는 귀주대첩을 향해 수렴한다. 그 과정에서 드라마는 고려 각지의 장수들을 하나씩 소환한다. 국경에서 거란과 치열하게 맞붙어 온 장군들, 지방의 호족, 강화파와 강경파 사이에서 갈등하는 문신들, 그리고 전쟁통에서도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세력까지. 강감찬은 이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전략과 외교, 설득과 위협을 모두 동원해 군사를 모은다. 단순히 ‘가만히 있어도 따라오는 명장’이 아니라, 정치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전략가로 그려진다.

전쟁은 마냥 화려한 역사가 아니다
이 드라마가 흥미로운 지점은, 전투 장면 못지않게 '전쟁을 준비하는 장면'에 엄청난 시간을 투자한다는 데 있다. 병력 동원령을 내리는 현종, 기근과 피난으로 지친 백성들을 다독이는 장면, 식량과 말, 화살을 확보하기 위해 밤낮으로 뛰어다니는 관료들. 귀주대첩은 그 모든 과정의 결과물로 제시된다. 전쟁의 결말이 어떻게 나는지는 이미 역사책을 통해 알고 있지만, 드라마는 그 결론을 향해 가는 인물들의 심리와 선택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귀주대첩 직전까지의 호흡이 길고 무겁다. 마치 마라톤 주자가 결승선 5km 전부터 점점 무거워지는 다리를 끌고 가는 것처럼. 누가 살아남고, 누구는 어디에서 쓰러지는지는 직접 드라마를 따라가며 확인하는 편이 좋다. 이 작품은 "어차피 아는 역사"라는 방심을 허용하지 않을 만큼, 각 장면마다 긴장감을 촘촘히 쌓아 올린다.
이제 이 작품이 가진 작품성을 해부해 보자. '고려 거란 전쟁'은 KBS 공영방송 50주년 특별기획 대하드라마답게, 오랜만에 제대로 된 전쟁 사극의 스케일을 부활시킨다. 총 32부작으로, 고려와 거란이 26년에 걸쳐 치른 2차·3차 여요전쟁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이미 수차례 다른 사극에서 스쳐 지나간 사건이지만, 이 드라마는 전쟁 자체를 제목으로 끌어올려 "전쟁이라는 사건이 사람과 나라를 어떻게 변형시키는가"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연출의 힘은 전투와 정치, 생활을 균형 있게 배치하는 데서 나온다. 귀주대첩 같은 대규모 전투 장면에서는 CGI와 세트, 엑스트라를 총동원해 병력의 물량감과 지형의 변수, 전략의 유효성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말이 질주하는 장면, 언덕과 강을 끼고 벌어지는 진형 싸움, 시간을 끌어 적을 지치게 만들고 기습으로 뒤를 치는 전술까지. 전투는 단순한 화력 대결이 아니라 머리를 쓰는 싸움, 마치 체스보다는 바둑에 가까운 긴 호흡의 게임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동시에 전쟁터 밖에서는 궁궐과 조정, 피난지와 농촌, 관청과 민가를 종횡무진하며 "전쟁이 일상이 된 사람들"을 보여준다. 이 리듬 덕분에, 전쟁 장면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피로감이 상대적으로 덜하다. 마치 헤비메탈 콘서트에서 가끔 발라드가 끼어드는 것처럼.
각본은 인물의 심리를 꽤 섬세하게 추적한다. 현종은 처음에는 공포와 죄책감에 휘둘리는 어린 군주다. 그러나 몽진과 피난, 반복되는 전쟁을 겪으면서 "왕의 자리란 무엇인가"를 몸으로 체득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점점 더 현실적이고 냉정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인물로 성장한다. 마치 '왕좌의 게임'에서 스타크 가문의 아이들이 겨울을 겪으며 변모하듯, 현종도 전쟁이라는 혹독한 겨울을 통과하며 군주로 단련된다. 강감찬은 그 옆에서 흔들림 없이 "해야 할 말을 하는 어른"으로 서 있다. 이 둘의 관계는 단순한 충·신의 관계를 넘어서, 서로를 성장시키는 스승과 제자, 동지의 관계로 확장된다. 특히, 왕이 내려야 할 결정을 신하에게 떠넘기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입으로 말하려 할 때, 강감찬은 조용히 그 결정이 온전히 왕의 몫이 되도록 옆을 비켜 서 준다. 이런 디테일이 이 드라마에서 느껴지는 '품격'을 만들어낸다.

조연 캐릭터들도 힘이 있다. 강조, 천추태후, 김치양 같은 인물들은 단선적인 악역으로 소비되지 않는다. 각자의 권력 욕망과 두려움, 자신이 믿는 질서를 지키려는 고집이 드러난다. 거란 측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단지 "침략자"가 아니라, 자신들이 최강국이라는 자부심과 자존심을 지닌 주체로 그려진다. 이런 묘사 덕분에 전쟁은 선악의 이분법적 싸움이 아니라 이해관계와 관점의 충돌로 보인다.
K-정통 대하사극의 맛, 볼래요?
시청자들이 이 드라마를 높게 평가한 또 하나의 이유는, 오랜만에 돌아온 '정통 대하사극의 맛'이다. 화려한 로맨스나 판타지 설정보다, 묵직한 국사와 인물의 도덕적 딜레마에 비중을 두는 서사는 최근 지상파에서 멸종위기종이 되어버렸다. '고려 거란 전쟁'은 이런 갈증을 채우듯, 전쟁과 정치, 리더십과 책임의 문제를 전면에 올렸다. 그 결과 2023 KBS 연기대상에서 작품과 배우들이 다수의 상을 싹쓸이하며 체면을 세웠다.
동시에 이 작품은 ‘승리의 서사’에 취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유지한다. 고려가 거란을 이겨냈다는 역사적 결과는 분명하지만, 그 승리 뒤에 쌓인 시체와 폐허, 백성들의 고통을 반복해서 비춘다. 강감찬조차 승리의 순간에 환호하는 대신, 전쟁이 남긴 상처를 바라보는 쪽에 가깝다. 마치 '세이빙 프라이빗 라이언'이나 '1917'처럼, 전쟁의 승리보다 전쟁의 비용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이 균형감이 '국뽕'과는 다른, 차분하고 성숙한 애국심을 자극한다.
그렇다고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방대한 시대와 인물을 다루다 보니, 초반 몇 회차는 인물과 세력 구도가 지나치게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다. 사극에 익숙하지 않은 시청자라면 "누가 누구 편인지" 정리하는 데 꽤 시간이 걸린다. 마치 '왕좌의 게임' 시즌1을 처음 볼 때 스타크, 라니스터, 타르가르옌을 구분하느라 헷갈렸던 것처럼. 또 제한된 예산 안에서 대규모 전투 장면을 구현하다 보니, 일부 회차에서는 CG와 합성의 한계가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인물 관계와 서사에 집중하는 스타일의 시청자라면, 이런 기술적 한계는 금세 눈에 덜 들어오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을 어떤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을지 생각해 보자. 먼저, 예전에 '용의 눈물'이나 '태조 왕건' 같은 정통 대하사극을 즐겼던 세대라면 '고려 거란 전쟁'은 반가운 귀환처럼 느껴질 것이다. 왕과 재상, 신하와 백성이 각자의 자리에서 고민하고 싸우는 이야기, 승리와 패배가 모두 값비싼 시대를 다시 한번 체험할 수 있다.
또, 리더십과 책임의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도 이 드라마를 권하고 싶다. 현종의 성장, 강감찬의 소신, 강조와 천추태후의 몰락은 모두 "권력을 쥔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전쟁을 배경으로 하지만, 결국은 조직과 공동체를 이끄는 사람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로 읽힌다. 지금 우리의 현실 정치와 사회를 떠올리며 보게 되는 순간이 많다. 마치 셰익스피어의 역사극이 엘리자베스 시대의 정치를 은유했던 것처럼.
학교에서 배웠던 역사가 너무 건조하게 느껴졌던 이들에게도 좋은 선택이다. 교과서 속 한 줄로 지나갔던 여요전쟁이, 구체적인 얼굴과 목소리, 땀과 눈물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로 다가온다. '고려 거란 전쟁'을 보고 나면, 아마 고려사 책장을 다시 펼쳐 보고 싶은 마음이 슬쩍 들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또 다른 시대를 다루는 대하사극이 나온다면, "이 작품처럼만 만들어 줘"라는 기준점이 하나 생겨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드라마는, 단지 한 편의 전쟁극이 아니라, 앞으로의 한국 사극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답안지 중 하나를 제시한 작품이라 할 만하다. 마치 '밴드 오브 브라더스'가 전쟁 드라마의 새로운 표준을 세웠던 것처럼, '고려 거란 전쟁'은 한국 사극의 새로운 벤치마크를 각인시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