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마다 골목길을 훑고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가 있다. 슬리퍼를 질질 끌며 나타나는 건 동네 사람들이 "바보형"이라고 부르는 방동구다. 마트를 도와 전단지를 돌리고, 편의점 야간 정리를 대신 해주고, 취한 아저씨를 집 앞까지 부축해주는 청년. 어른들 눈에는 한심하지만 착한 애, 아이들 눈에는 같이 놀아주는 동네 형에 가깝다.
카카오 웹툰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이 너무나 평범해 보이는 인물에게 처음부터 미묘한 균열을 심어 둔다. '본 시리즈'의 제이슨 본이 기억을 잃고 평범한 삶을 살려 했던 것처럼, 방동구도 평범한 청년을 연기한다. 다만 본은 자신이 킬러인 줄 몰랐고, 동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
밤이 되면 동구는 옥상으로 올라가 턱걸이를 하고, 어두운 골목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은 채 정밀한 동선으로 순찰하듯 걸어 다닌다. 독자는 곧 알게 된다. 방동구의 본명은 원류환, 북한 5446부대 출신 최정예 남파 공작원이라는 사실을. '킹스맨'의 에그시가 신사 스파이가 되는 과정을 거쳤다면, 류환은 바보 청년이 되는 과정을 거친 것이다.
가장 소소한 임무 - 동네 바보 되기
류환에게 내려진 첫 임무는 의외로 '소소'하다. 남한 최하계층 동네에 잠입해 완전히 섞여들고, 그들의 생활과 이념을 관찰한 뒤 보고하라는 것. '미션 임파서블'의 톰 크루즈가 크렘린에 잠입하거나, '제임스 본드'가 카지노에서 악당과 포커를 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거창한 폭파 공작도, 암살도 없다. 그저 관찰. 인류학자의 현장 조사 같은 임무.

그래서 그는 바보 연기를 택한다. 일부러 말을 더듬고, 눈웃음을 과장하고, 몸짓을 둔하게 만든다. 군에서 훈련받은 살인 기계의 몸으로, 빨래를 개고, 쓰레기를 버리고, 동네 할머니의 장독을 옮긴다. '캡틴 아메리카'가 70년간 얼음 속에 갇혀 있다가 깨어난 것보다, 류환이 바보 연기를 하는 게 더 힘들지도 모른다.
낮에는 골목 가드너처럼 구르다가도, 밤이면 군더더기 없는 자세로 턱걸이를 하고 칼을 다듬는 장면에서 독자는 이 인물 안에 겹겹이 쌓인 폭력성과 고독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데어데블'의 맷 머독이 낮엔 변호사, 밤엔 자경단원이었다면, 류환은 낮엔 바보, 밤엔 공작원이다.
동네 사람들이 준 선물...예상 밖의 온기
골목 사람들은 그를 완전히 '자기 사람'으로 받아들인다. 혼자 동생을 키우는 옆집 소년, 동네를 지키려는 구식 어르신들, 이 동네를 벗어나고 싶어 안달이 난 청춘들까지. 이들은 동구를 못 미더워하면서도, 꼭 필요한 순간에는 "그래도 착한 애지"라며 감싸준다.
'응답하라 1988'의 쌍문동 사람들이 덕선을 감싸 안았듯, 달동네 사람들도 동구를 품는다. 처음엔 모두 임무의 대상에 불과했던 이들이, 어느 순간부터 류환에게는 '지켜야 할 사람들'로 바뀌어 간다. 보고서에는 적지 않을, 그러나 몸에 새겨지는 온기의 기록이다. '레옹'이 마틸다를 만나 인간성을 회복했듯, 류환도 동네 사람들을 통해 '원류환'이라는 사람을 발견한다.

평온한 잠입 일상은 같은 5446부대 출신 동료들의 등장으로 균열을 맞는다. 남한에 내려와 톱스타가 되라는 지령을 받은 이해랑, 아이돌 연습생처럼 위장한 저격수 이해진. 셋은 본래 '조국을 위해 죽도록 훈련받은 무기'지만, 남한에서 맡은 역할은 개그맨 지망생, 동네 고딩, 바보형이다.
'어벤져스'가 모여 세상을 구한다면, 이들은 모여서... 라면을 끓인다. 실력과 신분 사이의 극단적인 언밸런스가 웹툰 초반의 코미디를 만든다. 셋이 모여 장난을 치는 장면만 보면 '프렌즈'의 센트럴 파크 삼총사처럼 그냥 시트콤에 가깝다. 그러나 독자는 알고 있다. 이들이 언제든 '존 윅' 모드로 돌아설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북쪽의 정치 상황과 남북 관계가 심상치 않게 요동친다는 징후가 포착된다. 화면에는 직접적으로 큰 뉴스가 등장하지 않아도, 북에서 내려오는 지령의 톤과 간접적인 대사에서 공기가 바뀐다. '왕좌의 게임'에서 "겨울이 온다"는 말이 반복되듯, 웹툰에서도 "상황이 바뀌었다"는 신호가 반복된다.
잠복과 관찰 중심이던 1단계 임무에서, 보다 노골적인 공작과 제거 지령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이 순간부터 류환, 해랑, 해진의 표정이 달라진다. "언젠가 올 줄 알았던 날"이 드디어 다가왔기 때문이다. '인셉션'에서 꿈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처럼, 평화로운 일상이 서서히 붕괴하기 시작한다.
류환은 자신의 정체성과 임무 사이에 끼어 서서 점점 찢겨 나간다. 한쪽에는 처음 자신을 받아준 골목 사람들, 다른 한쪽에는 조국과 상관의 명령, 또 다른 쪽에는 함께 내려온 동료들에 대한 책임감이 있다. '스파이더맨'의 피터 파커가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며 고민했다면, 류환은 "큰 거짓말에는 큰 죄책감이 따른다"며 고민한다.
웹툰은 이 갈등을 화려한 액션과 동시에 세밀한 심리선으로 밀어붙인다. 달동네 지붕 위 추격전, 골목 계단에서 벌어지는 접전, 비좁은 방 안에서의 근접 전투는 '본 시리즈'의 긴박함과 '올드보이'의 복도 씬 같은 날 것의 타격감을 동시에 품는다. 눈을 뗄 수 없게 치밀하다.
그런데 그 장면 중간중간, 류환이 동네 아이들의 웃음소리나 아주 사소한 일상을 문득 떠올리는 컷이 끼어든다. 폭력과 정이 동시에 그의 손을 잡고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가는 느낌이다. '다크 나이트'에서 배트맨이 "영웅으로 죽거나 악당으로 살거나" 선택을 강요받았다면, 류환은 "공작원으로 살거나 인간으로 죽거나" 선택을 강요받는다.
장르를 넘어선 ‘청춘의 비극’
후반부로 갈수록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단순한 간첩 액션물에서 조금씩 멀어진다. 5446부대가 어떻게 길러졌는지, 이들을 '괴물'로 만든 것은 누구인지, 골목이라는 가장 낮은 곳에서 호흡하는 사람들의 삶이 정치와 이념의 소용돌이와 어떻게 충돌하는지가 더 전면에 드러난다.

'풀 메탈 재킷'이 베트남전의 광기를 보여줬다면,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분단의 광기를 보여준다. 결말에서 이들이 결국 어떤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이 어떤 파장을 남기는지는 이 글에서 굳이 밝히지 않겠다.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은, '식스 센스'의 반전처럼 직접 페이지를 넘겨 도달하는 순간에야 온전히 작동하는 종류의 것에 가깝다.
'은밀하게 위대하게'가 흥미로운 건, 장르의 껍데기를 잔뜩 끌어다 쓰면서도 결국 사람 이야기로 귀결시킨다는 점이다. 구조만 놓고 보면 이건 스파이물, 첩보물, 액션, 청춘 성장, 분단 서사가 한데 뒤엉킨 작품이다. '킹스맨'의 스파이 액션, '본 시리즈'의 정체성 갈등, '응답하라' 시리즈의 동네 정서, '기생충'의 계급 문제가 한 웹툰에 들어있다.
그런데 웹툰은 그중 어느 하나로 완전히 기울지 않는다. 초반엔 철저히 코미디의 리듬을 탄다. 바보 연기 때문에 일부러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괜히 과장된 몸짓으로 동네 할머니에게 인정받으려 애쓰는 동구의 모습을 보며 독자는 '미스터 빈'을 보듯 호탕하게 웃게 된다.
그런데 서서히, 그 웃음을 유지하기 위해 그가 자신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얼마나 깎아내리고 있는지 보이기 시작한다. 같은 장면이 전반부에는 개그, 후반부에는 비극으로 겹쳐 읽히는 구조가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다. '조커'가 웃음과 광기를 섞었다면,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웃음과 슬픔을 섞는다.
인물의 이중성 설계도 탄탄하다. 류환은 "조국을 위해 죽을 준비를 한 군인"이자, "골목 어르신에게 혼나며 심부름하는 착한 청년"이다. 둘 중 어느 것도 가짜가 아니다. '브루스 웨인'과 '배트맨' 중 어느 것이 진짜인지 알 수 없듯, '원류환'과 '방동구' 중 어느 것이 진짜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까지 스스로를 규정하지 못한다.
이해랑과 이해진 역시 간첩이면서 연예계와 평범한 청춘을 동경하는 인물이다. 이들에게 남한의 드라마, 음악, 아이돌 세계는 단순한 위장 수단이 아니라 실제로 끌리는 세계다. '사랑의 불시착'의 리정혁이 남한 문화에 호기심을 가졌듯, 이들도 남한 문화에 빠져든다. 이 이중성은 곧 분단 체제에 의해 소모되는 청춘의 얼굴이기도 하다.
이념을 위해 훈련받았지만, 정작 그들이 마음으로 붙들고 있는 것은 다른 무엇이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상당히 쓸쓸한 울림을 남긴다. '1984'의 윈스턴이 빅 브라더의 감시를 받으며 살았듯, 이들도 조국의 감시를 받으며 산다. 차이가 있다면 윈스턴은 저항했고, 이들은... 선택을 강요받는다.
그림과 연출은 웹툰 포맷의 장점을 잘 활용한다. 느슨한 개그 컷에서는 과장된 표정, 간단한 배경, 동글동글한 캐릭터 디자인을 쓰다가도, 액션 장면과 감정의 절정에서는 비율을 잡고 묵직한 선을 사용한다. '원피스'가 개그와 진지함을 오가듯, 이 웹툰도 코미디와 비극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세로 스크롤이라는 구조를 살려, 좁은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는 몸, 옥상에서 지면으로 점프하는 장면을 길게 이어 보여줄 때, 독자는 스크롤을 내리는 손끝과 함께 인물의 추락을 체감하게 된다.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가 애니메이션 매체를 재발명했다면,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웹툰 액션을 재발명한다.
흑백과 한두 가지 채색을 중심으로 한 절제된 색감 덕분에, 골목의 어두움과 인물들의 고립감이 더 강하게 전달된다. '신 시티'나 '300'의 흑백 미학을 연상시킨다.

평범한 첩보물이 아닌 ‘일상 첩보물’
이 작품은 '본 시리즈'나 '킹스맨' 같은 간첩·스파이 소재를 좋아하지만 늘 비슷한 첩보극에 지쳤다면,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꽤 신선할 것이다. 이 웹툰은 정보기관 회의실이나 비밀 기지보다, 동네 목욕탕과 슈퍼, 옥상을 더 자주 보여준다.
총성과 폭발음 대신 빨래 널고 라면 끓이는 소리가 먼저 들린다. 그러다가, 그 평범한 일상 한가운데 잔혹한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의 파열음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 작품과 궁합이 잘 맞을 거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평범한 일상이 폭력으로 침투당하는 장면을 좋아했다면, 이 웹툰도 좋아할 것이다.
또, 분단과 이념 문제를 너무 무겁고 교과서적으로 다루는 이야기보다, 사람들의 표정과 생활을 통해 느끼고 싶은 독자에게도 권할 만하다.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북한과 남한을 둘 다 "뉴스에 나오는 국가"가 아니라 "밥 먹고 일하는 개개인의 세계"로 끌어내린다. '응답하라 1988'이 1988년을 사람들의 이야기로 그렸듯, 이 웹툰도 분단을 사람들의 이야기로 그린다.
그 안에서 청춘들이 어떤 선택을 강요받고, 무엇을 잃어버리는지 보는 것만으로도, 분단이라는 단어가 훨씬 가까이 다가온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삶에서도 '본 모습'과 '연기하는 모습' 사이에서 늘 어정거리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이 웹툰을 건네고 싶다. 회사에서, 가족 사이에서, 친구들 앞에서 서로 다른 가면을 쓰고 산다고 느낀 적이 있는 이라면, 동네 바보형 가면을 쓴 원류환의 모습이 남 얘기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다.
'주먹왕 랄프'가 "나는 악당이지만 나쁜 놈은 아니다"라고 말했듯, 류환도 "나는 공작원이지만 악인은 아니다"라고 말할지 모른다. 이야기를 끝까지 따라가고 나면, 아마 이런 질문을 한 번쯤 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누구의 명령 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을까, 그리고 정말 지키고 싶은 건 무엇일까."
그 질문이 조금 쓰리고 낯설더라도, 정면으로 마주해보고 싶다면,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꽤 오래 마음에 남는 한 편의 웹툰이 될 거다. 그리고 다음에 길에서 슬리퍼를 끌며 걷는 누군가를 보면, 혹시 그도 가면을 쓴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가 조금씩, 은밀하게, 위대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대단한 인기에 힘입어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2013년 영화로도 제작되어 김수현, 박기웅, 이현우 배우가 주연을 맡았다. 웹툰과 영화 모두 분단의 비극을 청춘의 언어로 번역해낸 작품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지금도 누군가는 이 웹툰을 읽으며, 자신이 쓴 가면을 벗을 용기를 얻고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