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어를 입력하고 엔터를 누르세요

복수라는 이름의 그리스 비극 ‘영화 올드보이’

schedule 입력:

제57회 칸느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숱한 영화 평론가 “한국 최고의 영화”

[KAVE=최재혁 기자] 술에 취해 파출소를 들락거리던 한 남자가 있다. 이름은 오대수(최민식), 딱히 성인군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악당도 아닌 ‘오늘만 대충 수습해서 사는’ 평범한 가장이다. 그런 그가 어느 비 오는 밤, 딸의 생일을 앞두고 친구와 통화하던 중 갑자기 증발해버린다. 마치 외계인에게 납치당하듯 감쪽같이 사라진 그가 눈을 뜬 곳은 좁디좁은 방. 창문은커녕 자연광이라고는 한 줌도 없고, 오직 텔레비전 한 대와 매일같이 배달되는 군만두, 그리고 수상쩍은 관리인만이 전부인 감금 공간이다.

누가 왜 자신을 가뒀는지,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카프카의 소설 주인공이라면 이쯤에서 관료제의 부조리함을 성찰했겠지만, 오대수에게 남은 건 세상의 소식이 흘러나오는 텔레비전과 끝없이 축적되는 분노뿐이다. 세월은 벽에 그은 빨간 줄로 새겨지고, 그는 콘크리트를 두드리며 탈출을 연습하고, 샌드백 대신 공기를 치며 몸을 만든다. 언젠가 문이 열릴 날을 상상하며 복수를 되뇌는 동안, 그의 얼굴은 점차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아니라 차라리 짐승에 가까운 무언가로 굳어간다.

그렇게 15년이 지난 어느 날, 그는 마치 누군가의 변덕스러운 장난처럼 느닷없이 풀려난다. 출소 통지서를 받은 것도, 경찰에게 구조된 것도 아니다. 마취에서 깨어나니 높은 옥상 위, 손에는 아직도 담배와 핸드폰이 들려 있고, 눈앞에는 감금 전과는 미묘하게 달라진 도시 풍경이 펼�처져 있다. 마치 ‘트루먼 쇼’의 주인공처럼, 그는 감옥에서 나왔지만, 정체 모를 누군가가 설계한 또 다른 거대한 무대 위로 들어선 셈이다.

오대수는 먼저 자신이 갇혀 있던 방의 단서를 좇는다. 그 15년 동안 가족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하는 과정은 차라리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처참하다. 그의 얼굴은 점점 더 거칠고 절박해지며, 관객은 어느새 이것이 단순한 탈출극이 아니라 정교하게 설계된 게임판 위의 말놀이임을 직감한다.

미도, 구원 or 미끼?

그 과정에서 만난 인물이 미도(강혜정)다.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남기고 쓰러진 오대수를 발견한 이 젊은 초밥 요리사는 어딘가 서툴지만 묘하게 단단한 태도로 그의 곁을 지킨다. 미도는 인생이 통째로 도난당한 이 남자를 향해 연민과 호기심,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막연한 끌림을 동시에 느끼며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연다.

둘은 함께 감금 장소의 흔적을 추적하고, 군만두 맛을 단서 삼아 범인을 좁혀나간다. 마치 탐정 놀이를 하는 한 쌍의 연인처럼 보이지만, 이 관계에는 설명하기 힘든 기묘한 정서가 겹쳐진다. 서로에게 구원인지 아니면 또 다른 함정인지 알 수 없는 ‘사랑’이라는 단어로는 도무지 설명이 안 되는 불안한 동행이 계속된다.

그러다 마침내 오대수를 가둔 장본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부유하고 정교한 계획을 가진 이우진(유지태), 그는 자신을 추적해온 오대수에게 오히려 질문을 던진다. “왜 내가 당신을 가뒀을까요?” 이 순간, 진실을 캐내기 위해 달려온 추적자는 어느새 수사 대상이 아니라 '게임의 참가자'로 전락해 버린다. 이우진은 정체를 숨기지 않고 호화로운 펜트하우스를 열어 보이며, 마치 퀴즈쇼 MC처럼 15년 감금의 이유를 스스로 찾아내 보라고 제안한다.

오대수의 분노는 더 뜨거워지지만, 관객은 서서히 다른 감정을 감지하게 된다. 이 이야기가 단순히 한 남자의 괴이한 복수가 아니라, 오래전 어떤 기억에서 시작된 비극의 되감기, 그리스 신화의 오이디푸스처럼 자신의 죄를 향해 걸어가는 운명의 여정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후의 전개는 말 그대로 심연 아래로 내려가는 나선형 계단이다. 오대수는 학창 시절, 사소하다고 여겼던 말과 행동이 누군가의 인생을 뿌리째 뒤틀어 놓았을지도 모른다는 실마리를 떠올린다. 기억의 방들을 하나씩 열어보는 과정은 ‘셜록 홈즈’의 추리극을 닮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죄를 마주하는 참회의 길처럼 보인다.

학교, 옛 친구들, 오래된 소문까지 모든 것이 퍼즐 조각으로 되살아난다. 진실에 다가갈수록 폭력은 더 잔혹해지고 감정은 더 극단으로 치닫는다. 영화는 끝내 마지막 문을 열기 직전, 가장 결정적인 비밀은 관객이 직접 확인하도록 남겨둔다. '올드보이'의 결말은 그야말로 복서의 일격처럼 치명적이고, 멍든 자리는 며칠이 지나도 욱신거린다.

‘시각적 파괴’·‘충격 스토리’로 당신의 삶을 묻다

‘올드보이’의 진짜 힘은 이 잔혹한 서사를 그저 자극적인 복수극으로 소비하지 않고, 기억과 죄의식, 타인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끝까지 파고든다는 데 있다. 박찬욱 감독은 이야기의 뼈대를 일본 만화 원작에서 가져오지만, 영화적 살과 피를 입히는 방식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대표적인 장면이 그 유명한 복도 롱테이크 액션이다. 장도리 하나를 든 채 수십 명과 맞붙는 오대수의 싸움은 ‘매트릭스’의 화려한 권총술이나 ‘킬빌’의 칼춤과는 차원이 다르다. 비틀거리는 몸, 헐떡이는 숨, 묵직한 타격감에 집중한다. 한 칸씩 밀고 나아가는 그의 뒷모습에는 15년 동안 홀로 벽을 두드리며 버텨온 시간이 고스란히 실려 있다. 이 장면은 이후 ‘데어데블’ 시리즈부터 ‘킹스맨’까지 수많은 작품이 오마주했지만, 여전히 원조의 무게감을 넘어서기 어렵다. 마치 비틀즈의 곡을 커버하는 밴드들처럼, 형태는 따라할 수 있어도 그 안에 담긴 절박함까지는 복제가 불가능하다.

색채와 음악, 세트 디자인도 작품성을 떠받치는 거대한 기둥이다. 어두운 보라와 붉은 색이 섞인 화면은 인물들의 욕망과 죄를 시각화하고, 이우진의 펜트하우스는 차갑게 정돈된 미니멀리즘으로 그의 왜곡된 권력 감각을 드러낸다. 최민식과 유지태, 강혜정의 연기는 이 기묘한 세계를 현실로 끌어내리는 핵심 장치다.

특히 최민식의 오대수는 초반의 술 취한 찌질함부터 후반부 인간 이하의 절규까지, 감정의 스펙트럼이 바이올린의 전 음역대를 긁어내듯 극단적으로 넓다. 그의 얼굴 하나만 클로즈업해도 관객은 대사의 절반은 이미 들은 듯한 기분이 된다. 유지태가 연기한 이우진은 반대로 표정을 절제하며 차분한 톤으로 공허한 절망을 보여준다.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 이 대조가 영화의 긴장을 끝까지 팽팽하게 유지시킨다.

대중이 사랑한 ‘보편적 공포와 윤리적 딜레마’

대중적 사랑의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올드보이는 극단적으로 비틀린 설정 속에서도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질문을 던진다. ‘내가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게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흉터였다면?’ SNS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이 질문은 더욱 날카롭다. 학창 시절 장난삼아 올린 게시물 하나가, 술자리에서 농담처럼 던진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삶을 어떻게 바꿔놓았을지 누가 알겠는가.

또한 “복수는 어디까지 인간적인 감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도 따라온다. 영화는 어느 쪽에도 쉽게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대신 관객 각자가 자신의 경험과 윤리에 맞춰 결론을 내리게 만든다. 그래서 이 작품은 세대와 국적을 넘어 다양한 해석을 낳았다. 누군가는 ‘최고의 복수극’이라고 부르고, 누군가는 ‘한국영화가 도달한 비극의 정점’이라고 말한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극찬했고,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으며, 스파이크 리가 리메이크를 시도했다가 원작의 무게에 짓눌렸다. 어느 쪽이든 한 번 본 뒤로는 쉽게 잊히지 않는 영화라는 평가만큼은 만장일치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세계 최고의 복수극’

올드보이를 추천하고 싶은 관객은 의외로 넓다. 우선, 장르영화를 좋아하지만 ‘아이언맨’식의 뻔한 영웅서사에 지친 관객이라면 이 영화에서 아주 낯선 카타르시스를 경험할 것이다. 오대수가 승리하는지 패배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끝까지 버티는 인간의 얼굴이 얼마나 처절하고도 아름다울 수 있는지 지켜보는 과정 자체가 마치 복싱 경기를 링사이드에서 보는 것 같은 체험에 가깝다.

시각적·연출적 완성도를 중시하는 관객에게도 올드보이는 필견의 작품이다. 한 장면, 한 컷, 배우의 눈빛 하나까지 모두 의도된 설계 위에 놓여 있어, 반복해서 볼수록 새로운 의미가 보인다. 마치 히치콕의 ‘현기증’이나 구로사와의 ‘라쇼몽’처럼, 이 영화는 여러 번 봐도 매번 다른 층위를 드러낸다.

다만 가벼운 오락을 기대하는 이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이 결코 가볍지 않아서,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 뒤에도 한동안 마음이 꺼끌꺼끌할 수 있다. 팝콘을 씹으며 즐길 '어벤져스'가 아니라, 조용히 혼자 앉아 삼키고 소화해야 하는 정식 코스 요리에 가깝다.

그런 무거운 잔상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면, 올드보이는 당신의 영화 인생에서 몇 안 되는 강렬한 체험으로 남을 것이다.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잔혹한 거울 같은 작품을 찾는 사람, 한국영화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사람에게 이 영화는 지금도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유효한 선택지다. 2003년 개봉 이후 20년이 넘게 흘렀지만, 올드보이가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현재형이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더 복잡해질수록, 이 영화는 더 오래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
링크가 복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