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어를 입력하고 엔터를 누르세요

다양한 변주의 매력 '김밥'

schedule 입력:

어떤 재료를 넣든 김으로 둘러싼 밥은 '김밥' 저렴한 한 끼 도시락에서 프리미엄 음식으로의 변화

[KAVE=이태림 기자] 한국식 김밥은 한 줄짜리 ‘한국식 도시락’이다. 도시락 전체가 잘 말려 있는 느낌이라고 설명하면 외국인들도 조금은 감이 온다. 밥과 채소, 계란, 고기, 때로는 치즈와 참치마요까지 온갖 재료가 김 한 장 안에 가지런히 들어가 한입 크기로 잘려 나온다. 젓가락이 없어도 손으로 집어 먹을 수 있고, 뜨거운 불 앞에 다시 서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소풍, 여행, 야근, 시위 현장, 기차역 플랫폼까지, 어디에서나 김밥을 꺼내 먹는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비롯해 K-콘텐츠 속에서 김밥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의 평범한 학생, 연습생, 직장인을 보여줄 때 손에 쥐어진 김밥 한 줄만큼 한국의 일상을 잘 설명해 주는 소품이 또 없다. 한국인에게 김밥은 ‘특별한 음식’이라기보다, 하루를 버티게 해주는 매우 현실적인 음식이기 때문이다.

김밥의 탄생과 한국식 변주

김밥의 기원에는 여러 설이 있지만, 대체로 ‘김(Seaweed)으로 싼 밥(Rice)’이라는 구조는 일본의 김초밥(마키즈시)와 비슷하다. 다만 한국식 김밥은 시간이 지나며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다. 초산과 설탕을 섞어 새콤하게 만든 밥에 생선을 채우는 일본식 초밥과 달리, 한국식 김밥은 밥을 참기름과 소금으로 간해 고소한 풍미를 강조한다. 속 재료도 생선보다 볶은 고기, 계란지단, 각종 나물과 단무지가 중심이 된다.

1970~80년대 한국의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싸서 들고 다니기 쉬운 한 끼’가 필요해졌다. 집에서 엄마가 싸 주던 김밥은 학교 소풍의 상징이었고, 도시락 문화의 중심이었다. 이후 김밥 전문 분식점이 생겨나면서 ‘김밥은 집에서 싸는 것’에서 ‘동네에서 언제든 사 먹는 것’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편의점 김밥, 프랜차이즈 김밥, 프리미엄 수제 김밥까지 등장하면서 지금은 한국 어느 도시, 어느 지하철 출구에서든 김밥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해외에서는 K-드라마나 애니메이션,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김밥을 베어 물며 연습생 생활을 버티거나, 전투를 앞두고 허기를 달래는 장면이 나오곤 한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 같은 작품이 김밥을 화면 중앙에 가져온 것은, 한국의 일상과 정서를 세계에 전하는 간단하면서도 강력한 장치이기 때문이다.

김밥은 어떻게 만들어질까...단순하지만 섬세한 과정

김밥 만들기의 기본 구조는 간단하다. 방금 지은 따뜻한 밥에 소금과 참기름을 넣어 비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질지 않게, 하지만 너무 날리지 않게’ 만드는 점이다. 김밥용 밥은 한 톨 한 톨 살아 있으면서도 서로 부드럽게 달라붙어야 한다. 밥이 너무 질면 자르기가 어렵고, 너무 마르면 씹을 때 푸석푸석해진다.

전통적인 김밥의 기본 재료는 계란지단, 단무지, 시금치 나물, 당근 볶음, 오이(또는 오이 대신 데친 무청이나 부추), 그리고 햄 또는 소고기 볶음이다. 계란은 얇게 부쳐 채 썰고, 당근은 가늘게 썰어 소금 간을 약간 해서 볶는다. 시금치는 데쳐서 물기를 짠 다음 참기름과 소금으로 무친다. 단무지는 길게 썰어 그대로 넣고, 햄이나 고기는 간장·설탕·마늘로 양념해 볶아 넣는다. 이 모든 재료는 ‘길고 곧게’ 써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말았을 때 단면이 고르게 나온다.

김발 위에 김을 올리고, 준비한 밥을 얇고 고르게 펴 바른다. 끝 부분 한 줄 정도는 비워두어 말았을 때 접착부가 되도록 한다. 밥의 두께는 너무 두껍지 않게, 밥알이 살짝 보일 정도로 펴야 먹을 때 부담스럽지 않다.

밥 위 가운데 부분에 속 재료를 가지런히 올린다. 단무지의 노란색, 계란지단의 노란색, 시금치의 초록, 당근의 주황, 햄이나 고기의 갈색이 나란히 놓여 색감부터 식욕을 돋운다. 이때 재료의 순서와 높이를 잘 맞춰야 말았을 때 균형이 잡힌다.

김발을 이용해 앞쪽 끝에서부터 재료를 감싸며 단단하게 말아 올린다. 이 과정에서 너무 힘을 주면 속 재료가 으깨지지만, 힘을 너무 빼면 자를 때 풀어진다. 적당한 압력으로 꾹꾹 눌러가며 원통형을 만들어 준다. 마지막엔 김의 빈 끝 부분에 참기름이나 물을 살짝 발라 ‘풀’처럼 붙인다.

완성된 김밥 롤 위에 참기름을 살짝 바르고 손이나 붓으로 골고루 문지른 후, 깨를 솔솔 뿌린다. 칼은 김밥 자르기 직전 물을 묻혀 닦아주는 것이 좋다. 그래야 밥이 칼에 들러붙지 않고 단면이 깔끔하게 떨어진다. 한입 크기, 보통 1.5cm 안팎으로 잘라 접시에 가지런히 담으면 비로소 ‘김밥 한 줄’이 완성된다.

무엇을 넣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는 김밥의 세계

김밥의 가장 큰 매력은 ‘무한 변주’에 있다. 기본 틀은 김과 밥이지만, 그 안에 무엇을 넣느냐에 따라 맛과 성격이 완전히 바뀐다.

가장 전통적인 조합은 앞서 언급한 계란·단무지·시금치·당근·햄(또는 소고기)이다. 이 조합은 고기와 채소, 단맛과 짠맛, 부드러움과 아삭함이 균형을 이룬다. 노란 계란과 단무지, 초록 나물, 주황 당근, 갈색 고기가 만드는 단면의 색감도 ‘김밥의 교과서’라고 부를 만하다.

외국인들이 가장 쉽게 사랑에 빠지는 김밥이 바로 참치마요 김밥이다. 기름에 절인 참치를 기름을 적당히 빼고 마요네즈와 섞어 속으로 넣는다. 씹는 순간 고소한 참치의 풍미와 부드러운 마요네즈가 밥과 뒤섞이면서, 서양식 샌드위치와 한국식 김밥이 만난 듯한 맛을 낸다. 양파를 잘게 썰어 같이 넣으면 톡 쏘는 향이 느끼함을 잡아 준다.

달콤짭조름하게 양념한 소고기 불고기를 넉넉히 넣으면 ‘식사형’ 김밥이 된다. 밥과 고기의 비율이 높아져 한 줄만 먹어도 꽤 든든하다. 불고기의 간장·설탕·마늘 향이 밥과 섞여 씹을수록 깊은 감칠맛이 나온다. 불고기 김밥은 아이들뿐 아니라 고기 선호가 강한 외국인에게도 반응이 좋다.

고기를 빼고 각종 채소만 넣으면 훌륭한 비건·채식 김밥이 된다. 시금치, 오이, 우엉, 당근, 피망, 버섯, 아보카도 등을 넣을 수 있다. 이 경우 밥 간을 조금 더 섬세하게 해야 하고, 채소에서 나오는 수분이 너무 많지 않도록 살짝 볶거나 데쳐 수분을 줄여준다. 여러 채소의 향과 식감이 섞이면서 입안에서 ‘샐러드와 밥을 동시에 먹는’ 느낌이 난다.

스트링 치즈나 슬라이스 치즈를 넣으면 부드러운 우유 풍미가 더해진다. 돈가스(튀긴 돼지고기 커틀릿)를 통째로 넣고 말면 씹는 맛이 강한, 거의 ‘랩 샌드위치’에 가까운 김밥이 된다. 멸치를 달짝지근하게 볶아 넣으면 바다 향과 고소함이 올라온다. 김치볶음을 넣은 김치 김밥, 매운 고추나 마라 소스를 살짝 더한 매운 김밥도 있다.

이렇게 재료의 조합만 바꾸면 김밥은 건강식, 간단한 간식, 술안주, 아이들 간식, 다이어트 식단까지 각각 다른 정체성을 얻게 된다.

김밥의 맛: 고소함, 짭조름함, 달콤함의 층위

이제 가장 중요한, ‘김밥의 맛’을 조금 더 집요하게 파고들어 보자. 김밥을 한입 베어 물었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김과 참기름의 향이다. 구운 김 특유의 살짝 탄 듯한 향, 바다 내음이 입 안 위쪽으로 먼저 훅 올라온다. 그 위에 참기름의 고소한 향이 겹쳐진다. 이 향 조합 때문에 김밥은 따뜻하지 않아도 풍성한 풍미를 느낄 수 있다.

그 다음에는 밥의 식감과 간이 온다. 잘 지은 김밥용 밥은 입 안에서 뭉개지지 않고, 치아 사이에서 톡톡 끊어지며 부드럽게 퍼진다. 소금 간은 너무 세지 않게, 참기름의 고소함이 풍미를 주도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 밥이 일종의 ‘캔버스’가 되어, 속 재료들의 맛을 하나씩 담아낸다.

속 재료가 다양한 김밥의 단면을 한입에 넣으면, 식감의 층위가 동시에 느껴진다. 단무지의 아삭함, 계란지단의 폭신함, 시금치나 오이의 촉촉한 씹힘, 햄이나 고기의 탄력 있는 식감이 한 번에 겹쳐진다. 이때 가장 중요한 조연이 바로 노란 단무지다. 단무지는 짠맛과 단맛, 약간의 신맛이 섞여 있어 전체적으로 느끼해지기 쉬운 조합 속에서 입맛을 환기시킨다. 단무지가 없으면 김밥 전체가 밋밋해지고, 단무지가 적당히 들어가야 ‘한국적인 단짠단짠’ 맛이 완성된다.

맛의 균형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렇다. 참기름과 김이 ‘고소함’을, 햄·고기·간장 양념이 ‘짭조름함’을, 단무지·볶음 재료 일부가 ‘은은한 단맛’을, 시금치·오이·당근 등 채소가 ‘신선함과 약간의 쌉싸름함’을 더한다.

이 네 축이 무너지지 않는 선에서 재료를 바꾸고 더하는 것이 김밥 맛의 핵심이다. 참치마요 김밥의 경우, 참치와 마요네즈의 풍부한 지방이 고소함과 부드러움을 극대화하는 대신, 단무지의 개운함과 오이의 시원함이 그 느끼함을 잡아 준다. 불고기 김밥에서는 불고기의 단짠양념이 중심이 되기 때문에 밥 간을 조금 약하게 하고, 채소를 상대적으로 많이 넣어 균형을 맞춘다.

온도도 김밥 맛을 좌우한다. 갓 만든 김밥은 밥이 따뜻해서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포근한 느낌이 강하다. 시간이 지나 약간 식은 김밥은 밥과 김이 서로 조금 더 단단히 붙으면서 씹는 맛이 또렷해지고, 단무지와 나물의 식감이 더 살아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김밥은 막 싼 것보다, 약간 식었을 때가 더 맛있다”고 말한다.

곁들임 음식도 김밥의 맛을 확장시킨다. 대표적인 것이 노란 단무지 추가, 라면, 떡볶이, 김치다. 김밥만 먹다 보면 입이 살짝 기름져지는데, 김치 한 조각이나 매콤한 떡볶이 국물을 곁들이면 입안이 다시 정리된다. 그래서 한국 분식집에서는 ‘김밥+라면’, ‘김밥+떡볶이’가 거의 공식 세트처럼 팔린다. 담백한 김밥과 국물 혹은 소스의 강렬한 맛이 서로를 보완해 준다.

김밥이 외국인에게 특별한 이유

외국인의 시선에서 김밥은 단순한 스트리트 푸드가 아니다. 하나의 롤 안에 한국인의 식습관과 정서가 압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밥을 중심에 두고, 채소와 단백질을 고루 섞어 먹는 방식, 가족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 도시락을 싸주던 문화, 소풍이나 여행 때 김밥을 나눠 먹는 경험이 모두 이 한 줄에 담겨 있다.

또한 김밥은 ‘낯설지 않은 한국 음식’이라는 점에서 강점이 있다. 매운 김치찌개나 강한 발효 향을 가진 일부 음식보다, 김밥은 상대적으로 부드럽고 친숙하다. 빵 대신 밥, 햄과 계란, 채소, 마요네즈 등 익숙한 재료가 들어가 ‘아시아식 샌드위치’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비롯한 K-콘텐츠가 김밥을 여러 차례 전면에 등장시키면서, 해외 팬들 입장에서는 “한국에 가면 꼭 먹어봐야 할 음식 리스트”에 김밥이 자연스럽게 포함되고 있다. 서울의 번화가, 지하철역 근처 분식집, 편의점에서 손쉽게 김밥을 사 먹는 경험은, 한국을 ‘일상까지 체험할 수 있는 나라’로 느끼게 만든다.

김밥은 결국, 한 줄 안에 여러 맛과 이야기를 품은 음식이다. 바다에서 온 김, 땅에서 자란 채소, 논의 쌀, 축산물, 그리고 그 재료들을 손질하고 말아 올린 사람의 손길까지 모두 얽혀 한입에 들어온다. 그래서 김밥을 천천히 음미해 보면 단순히 ‘맛있다’는 말을 넘어, 왜 이 음식이 한국인의 일상과 K-컬처의 상징이 되었는지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
링크가 복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