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tflix's 'Pavane' Review 2026: The Ultimate Cinematic Rebellion Against the Hyper-Visibility 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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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AM PARK
By SUNAM PARK 편집장

Subtitle: How Marginalized Youth Find Love and Salvation Amid Scopic Capitalism's Shado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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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tflix's 'Pavane' Review 2026: The Ultimate Cinematic Rebellion Against the Hyper-Visibility Era [Magazine Kave=Park Sunam]
[Magazine Kave=박수남 기자] 전 세계가 숏폼 콘텐츠의 자극적인 쾌락과 소셜 미디어의 화려한 이미지에 탐닉하며 끊임없는 도파민의 굴레에 빠져 있는 2026년 2월 20일, 넷플릭스 글로벌 플랫폼에 조용히 안착한 한국 영화 〈파반느(Pavane)〉는 현대 대중문화의 거대한 흐름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기묘하고도 묵직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이종필 감독이 연출하고 고아성, 변요한, 문상민이 주연을 맡은 이 작품은 박민규 작가의 2009년작 동명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영화가 공개된 직후 대다수의 주류 매체와 표층적인 알고리즘 리뷰어들은 이 작품을 두고 '외모지상주의로 상처받은 이들의 따뜻한 치유기'라거나 '청춘들의 풋풋한 첫사랑 이야기'라는 납작하고 감상적인 수식어를 붙이는 데 급급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작품이 내포한 심연의 철학을 철저히 오독한 결과이며, 작품의 텍스트가 지닌 급진성을 거세하는 게으른 비평이다.  
〈파반느〉는 단순히 '못생긴 사람들의 슬픈 연애담'이 아니다. 이 작품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강제하는 '시선의 폭력'과, 그 폭력적 구조 속에서 완벽하게 소외되고 지워진 자들이 벌이는 처절하고도 우아한 실존적 투쟁에 관한 심오한 사회학적 텍스트다. 1980년대 서울 변두리를 배경으로 한 이 조용하고 느린 한국 영화에 오늘날 글로벌 독자들과 관객들이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이유는 명확하다. 오늘날 전 세계의 세대는 '보여짐'이 곧 생존이자 권력이요, 자본이 된 가혹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전시된 삶을 24시간 목도하며 스스로를 끊임없이 비교하고 갉아먹는 '과잉 가시성(Hyper-visibility)'의 시대 속에서, 기술적 연결은 넘쳐나지만 역설적으로 인간의 고유한 영혼은 철저히 고립되어 간다.  
이러한 맥락에서 〈파반느〉가 그려내는 '투명 인간'들의 연대와 침묵은, 과잉 연결과 스펙터클의 홍수 속에서 질식해 가는 현대인들에게 보편적인 서늘함과 실존적 위로를 동시에 타격한다. 가장 거대하고 상업적인 시각 매체인 넷플릭스를 통해 가장 '비시각적' 존재들의 투쟁이 전 세계로 송출되고 있다는 사실은 21세기 디지털 저널리즘과 영상 예술이 마주한 지독한 아이러니이자 압도적인 성취다.
주목 경제와 과잉 가시성의 덫: 스코픽 자본주의의 잔혹한 생태계
〈파반느〉의 텍스트를 현대 사회학의 관점에서 해부하기 위해서는 오늘날 우리가 처한 시각적 환경의 척박함을 먼저 인지해야 한다. 현대의 소셜 미디어와 데이팅 앱 알고리즘은 이스라엘의 사회학자 에바 일루즈(Eva Illouz)가 예리하게 지적한 '스코픽 자본주의(Scopic Capitalism)'의 정점을 보여준다. 스코픽 자본주의란 인간의 시선(gaze)과 신체의 이미지가 직접적인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며, 개인의 시각적 자아가 끊임없이 평가되고 알고리즘에 의해 가치가 추출되는 억압적인 시스템을 의미한다.  
이 폭력적인 생태계 속에서 인간의 감정과 관계마저 철저히 상품화되며, '시각적으로 화려하게 전시되지 않는 삶'은 데이터 생태계에서 존재하지 않는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된다. 일루즈와 단 코틀리아(Dan Kotliar)의 연구에 따르면, 오늘날의 자본주의 주체성은 철저히 시각화된 자아(the visualized self), 평가적 이성(evaluative reasoning), 그리고 데이터로 분절된 에로티시즘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 안드레아 브리겐티(Andrea Brighenti) 역시 가시성(visibility)이 단순한 물리적 상태를 넘어 현대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효과를 창출하는 핵심적인 생명정치적(bio-political) 무기임을 설파한 바 있다.  
이러한 가시성의 폭력은 〈파반느〉의 배경이 되는 1980년대 서울의 한 백화점에서 이미 그 잔혹한 맹아를 틔우고 있었다. 작품 속 인물들이 처한 비극의 핵심은 영국의 사회학자 캐서린 하킴(Catherine Hakim)이 주창한 '심미적 자본(Aesthetic Capital)' 혹은 '에로틱 자본(Erotic Capital)'의 파산에서 기인한다. 하킴은 아름다운 외모, 성적 매력, 세련된 자기표현 능력이 경제적 자본, 문화적 자본, 사회적 자본에 이은 제4의 자본으로서 현대 사회에서 강력한 권력으로 작동한다고 역설했다. 부르디외(Bourdieu)의 자본 이론이 간과했던 이 육체적, 심미적 우위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가장 직관적이고 폭력적인 형태로 교환 가치를 창출한다.  
극 중 백화점 지상층은 눈부신 조명 아래 완벽하게 포장된 상품들과 심미적 자본을 풍부하게 갖춘 자들만이 존재할 수 있는 승자독식의 무대다. 소비의 스펙터클이 절정에 달한 이 화려한 공간은 현대의 인스타그램 피드나 틱톡의 추천 알고리즘 탭과 정확히 일치한다. 반면 주인공 미정(고아성 분)을 비롯한 인물들이 숨어드는 백화점 지하 주차장의 어두컴컴한 창고는 심미적 자본을 철저히 결여한 채 파산 선고를 받은 자들의 유배지이자 무덤이다. 원작이 출간된 지 17년이 지났고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40여 년 전이지만, 자본주의와 심미적 자본의 명암은 2026년 현재 더욱 기괴하고 폭력적으로 진화했다.

미정은 백화점에 수석으로 입사할 만큼 뛰어난 지적 능력(문화적 자본)을 갖추었으나, 단지 외모라는 심미적 자본이 철저히 부재하다는 이유만으로 '공룡'이라 불리며 남들에게 손가락질받는 존재로 전락한다. 사회는 그녀의 내면이나 능력을 궁금해하지 않으며, 오직 표층적인 시각 데이터만으로 그녀의 존재 가치를 기각해 버린다. 미정이 세상으로부터 숨어버린 것은 나약한 패배가 아니라, 스코픽 자본주의의 폭력적 알고리즘 속에서 데이터로 쪼개져 소모되는 것을 거부하려는 매우 당위적이고 주체적인 방어 기제다.
장폴 사르트르의 '시선(Le Regard)'과 수치심의 존재론
〈파반느〉를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철학적 기조는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실존주의 철학, 그중에서도 그의 기념비적 저작 『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에서 전개된 '시선(Le Regard)'의 이론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 세상을 주체적으로 인식하고 자신의 삶을 기투(Project)하는 '대자존재(pour-soi)'로서 자유를 누린다. 대자존재 상태에서 인간은 세상을 바라보는 주체이며, 사물들은 나의 의도에 따라 의미를 부여받는 배경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복도에서 열쇠 구멍을 통해 방 안을 훔쳐보다가 누군가의 발소리를 듣고 타인의 시선에 노출되는 순간을 상상해 보라. 그 순간 인간은 세상을 바라보던 주체에서 타인의 시야에 포착된 하나의 사물, 즉 '즉자존재(en-soi)'로 급격히 전락하고 만다. 타자의 시선은 나의 자유를 탈취하고 나를 객체화(Objectification)한다. 이때 발생하여 인간의 영혼을 잠식하는 근원적인 감정이 바로 '수치심(Shame)'이다.  
사르트르에게 수치심은 단순한 심리적 부끄러움이나 도덕적 반성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타인에 의해 하나의 객체로 전락했음을 깨닫는 소외의 순간"이자, 타인이 나를 바라보고 판단하는 그 낯설고 무력한 이미지에 나 자신이 갇혀버렸다는 뼈아픈 존재론적 자각이다. 타인은 나를 바라봄으로써 내 존재의 비밀을 쥐게 되고, 나의 가장 내밀한 자아는 타인의 시선이라는 감옥 안에 유폐된다. "지옥은 곧 타인이다(L'enfer, c'est les autres)"라는 사르트르의 유명한 명제는 바로 이 시선의 폭력성을 요약한 것이다.  
영화 〈파반느〉 속 미정이 겪는 끔찍한 고통은 단지 거울을 볼 때 느껴지는 미학적 결핍에서 오는 얄팍한 우울감이 아니다. 그것은 주류 사회의 무자비한 시선이 그녀를 재단하고 대상화함으로써 발생하는 완벽한 실존적 파괴이며, 영구적인 수치심의 상태다. 지상층의 화려한 인간들은 미정을 대자존재(주체)로 대우하지 않는다. 그들의 차가운 시선 속에서 미정은 불쾌함을 유발하는 거추장스러운 즉자존재(사물)로 전락한다. 사르트르가 갈파했듯, 타인의 시선 앞에서 우리는 타인이 우리에게 부여한 객체성을 파괴하기 위해 역으로 타인을 대상화하려는 투쟁을 벌인다. 그러나 심미적 자본이 완전히 결여된 미정에게는 그 시선을 반사할 무기가 없다. 따라서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실존적 저항은 그 폭력적인 시선의 장(Field) 자체에서 탈주하여 백화점 지하의 짙은 어둠 속으로, 아무도 자신을 객체화할 수 없는 완벽한 비가시성(Invisibility)의 세계로 망명하는 것뿐이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학: 투명한 응시의 연대
그러나 영화는 사르트르의 비관적인 시선 존재론에 머물지 않고, 관계의 구원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세상의 폭력적인 시선이 닿지 않는 백화점 지하 주차장과 야간 놀이공원, 그리고 낡은 켄터키 호프집이라는 심해와도 같은 폐쇄적 공간에서 미정은 자신과 비슷한 결핍을 가진 두 남자, 경록(문상민 분)과 요한(변요한 분)을 만난다.  
이들의 만남과 관계 맺기는 프랑스의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가 주창한 '타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의 완벽한 영화적 구현이다. 레비나스는 사르트르와 달리 타인의 시선을 나를 사물화하는 위협으로만 보지 않았다. 그는 타인의 '얼굴(Visage)'을 마주하는 것은 나의 이기적 자아를 넘어 타자의 무한한 타자성을 환대하고 그에 대해 윤리적으로 응답할 책임(Responsibility)을 요구받는 경이로운 사건이라고 보았다.  
경록은 스무 살 무렵 무용수의 꿈을 접고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청년이며, 요한은 가벼운 농담과 익살 뒤에 삶의 짙은 불안과 진짜 상처를 교묘하게 은폐하고 있는 인물이다. 이들은 각기 다른 형태의 결핍을 안고 있지만, 미정의 흉터투성이 외투 아래 감춰진 고귀한 영혼을 대상화(Objectification)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이들은 서로의 상처를 관음증적으로 전시하지 않으며, 값싼 동정으로 타자의 고통을 대상화하는 오만을 범하지도 않는다.  
켄터키 호프집에서 세 사람이 모였을 때, 요한은 사랑에 대해 이렇게 일갈한다. "모든 사랑은 오해다. 그 사람은 남들과 다르다는 오해. 그리고 영원할 거라는 오해.". 이 서늘하고도 냉소적인 대사는 역설적으로 낭만적 사랑이 가진 허상을 걷어내고, 오직 타인을 향한 '기적적인 오해'만이 잔혹한 세상에서 우리의 삶을 구원할 수 있음을 갈파하는 철학적 아포리즘이다. 경록이 미정을 향해 보내는 시선은 스코픽 자본주의의 평가적 이성이 거세된 투명하고 무해한 응시다. 세상이 자신들을 비가시적 존재로 규정했다면, 역으로 그 세상의 시선을 차단하고 오직 서로의 맑은 눈동자만을 거울삼아 실존을 증명하겠다는 선언.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영혼에 불을 밝히는 이 과정은 , 타인의 시선이 나를 지옥으로 밀어 넣을 수도 있지만 동시에 오직 타인의 애정 어린 응시만이 내 영혼을 주체적 존재로 구원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눈물겨운 기적이다.  
이종필 감독의 시네마토그래피: 어둠 속에서 빛을 조각하는 아날로그적 문법
박민규 작가의 소설을 영상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은 그 자체로 거대한 미학적 모험이었을 것이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탈주〉, 〈박하경 여행기〉 등을 통해 시대의 공기와 인물들의 생동감을 탁월하게 조율하며 자신만의 독보적인 연출 세계를 구축해 온 이종필 감독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고 마치 자신이 직접 쓴 소설 같다는 강렬한 운명적 일체감을 느꼈다. 감독은 원작 첫 장의 문구인 "역시나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해야 할 당신을 위해"를 작품의 나침반으로 삼아, 청춘의 멜로라는 장르의 외피 속에 깊은 실존적 주제를 아로새겼다.  
소설 속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1인칭 화자의 내면 서사를 짧고 임팩트 있는 영상 언어로 치환하는 과정은 경이롭다. 영화 초반부, 박해준의 뜻밖의 등장과 함께 불꽃축제처럼 터지는 감각적인 영상, 재치 있는 대사, 만화 같기도 하고 뮤직비디오 같기도 한 편집 리듬은 자칫 무겁게만 가라앉을 수 있는 서사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그러나 감독의 진정한 성취는 이러한 표면적 경쾌함 이면에 자리한 깊은 슬픔을 포착하는 카메라 앵글의 변주에 있다. 인물의 외면을 멀리서 관조하는 풀샷(Full-shot)에서 예고 없이 인물의 정면 눈빛을 포착하는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전환하는 앵글은, 관객으로 하여금 인물의 표피를 찢고 들어가 내면의 캄캄한 우물 속으로 강제 이입하게 만드는 강력한 영화적 장치다. 이로 인해 관객은 영상을 보면서도 텍스트를 읽는 듯한 짙은 문학적 여운을 느끼게 되며, 원작의 1인칭 시점이 지녔던 한계를 넘어 미정, 요한, 경록 세 사람 모두의 시점이 입체적으로 교직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특히 이 영화 전반을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빛과 어둠의 미장센'은 인물들의 심리를 대변하는 철학적 은유의 결정체다. 감독은 김미정이라는 인물을 '어둠 속에 방치된 어두운 전구'로 상정했다. 영화는 백화점 지하 주차장의 창백하고 기계적인 형광등 불빛, 엘리베이터 문과 거울을 통해 투영되는 일그러진 자아, 그리고 켄터키 호프집의 낡은 조명 등 빛의 부재와 왜곡을 통해 인물들의 단절된 심리를 묘사한다.  
그러나 영화가 절정으로 치달을수록 이들은 오로라, 붉은 노을, 무지개 등 장엄하고도 숭고한 자연의 빛을 마주하게 된다. 특히 작품에 등장하는 오로라 씬은 자본과 타협한 컴퓨터 그래픽(CG)의 안일함에 기대지 않고, 감독과 주연 배우들이 아이슬란드 등지로 직접 날아가 치열하게 촬영해 낸 기적 같은 결과물이다. 인간을 평가하고 억압하는 백화점의 인공 조명을 벗어나, 우주가 선사하는 근원적이고 차별 없는 빛 앞에 선 세 청춘의 모습은 그 자체로 숭고한 종교적 체험을 연상시킨다. 또한 영화 속 LP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1980년대 분위기의 창작곡들, 클래식과 록을 넘나드는 다채로운 음악의 배치는 시각적 정보에 지친 관객들의 청각적 감수성을 자극하며 감정의 진폭을 무한대로 확장시킨다. 어항 속에 갇힌 채 자신들만의 느린 춤(파반느)을 추는 세 마리 물고기의 메타포는 이 아날로그적 문법의 백미다.  

인물과 육화(Incarnation): 세 배우가 빚어낸 결핍의 앙상블
이러한 깊이 있는 서사와 문학적 상징들은 고아성, 변요한, 문상민이라는 세 배우의 처절하고도 결연한 연기적 헌신을 통해 비로소 스크린 위에 육화(Incarnation)되었다. 이들의 연기는 단순한 캐릭터의 재현이나 모방을 넘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폭력에 의해 지워진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금 복원해 내는 제의적 살풀이와도 같다.  

고아성의 결연한 하강과 미정의 복원
미정 역을 맡은 고아성의 존재감은 이 영화의 심장이자 굳건한 척추다. 그녀는 여배우로서 자본주의 시각 매체가 요구하는 전형적인 '예쁨'과 심미적 자본을 철저히 내려놓고, 캐릭터의 처연한 질감을 구현하기 위해 체중을 10kg이나 증량하는 육체적 헌신을 보여주었다. 미정은 세상의 무자비한 조롱에 의해 스스로를 지하 창고의 심연에 유폐시킨 인물이지만, 그녀의 내면에는 누구보다 깊은 지성과 섬세한 감수성이 숨쉬고 있다.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의 곡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들으며 자신만의 견고한 내면의 성을 쌓아 올린 미정의 우아함은, 고아성의 극도로 절제된 대사 처리와 미세하게 떨리는 동공 연기를 통해 스크린을 압도한다. 고아성은 단단하게 닫혀 있던 미정의 방어막이 경록의 투명하고 다정한 시선 앞에서 서서히 허물어지고, 마침내 타인을 사랑함으로써 스스로 발광(發光)하는 존재로 변화해 가는 과정을 경이로운 밀도로 그려낸다.
변요한의 이중주와 요한의 서늘한 비애
변요한이 연기한 요한은 원작의 화자이자 미정과 경록을 이어주는 결정적인 교량 역할을 수행한다. 〈미스터 션샤인〉, 〈자산어보〉, 〈소셜포비아〉 등의 굵직한 작품에서 장르와 시대를 불문하고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입증해 온 변요한은, 이 작품에서 가장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감정선을 타는 입체적 인물을 창조해 냈다. 요한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처럼 보이며 끊임없는 수다와 익살스러운 농담으로 삶의 불안을 능청스럽게 방어하지만, 불현듯 찾아오는 찰나의 침묵 속에서 누구보다 깊은 상처와 서늘한 비애를 뿜어낸다. 그의 냉소적인 태도는 사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세상보다 먼저 자신을 조롱해 버리는 슬픈 생존 본능이다. 변요한은 따뜻함과 차가움, 한없는 가벼움과 짓누르는 진지함을 오가는 탁월한 완급 조절로 요한이라는 캐릭터에 페이소스 넘치는 숨결을 불어넣었다.
문상민의 맑은 시선과 경록의 투명함
무용수라는 꿈을 포기하고 백화점 주차장 아르바이트로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스무 살 청년 경록 역의 문상민은 이 영화가 거둔 가장 눈부신 수확 중 하나다. 경록은 이 영화에서 관객의 눈을 대신하는 윤리적 관찰자다. 그는 미정의 흉터투성이 껍데기에 시선을 멈추지 않고, 그 아래 감춰진 고귀한 영혼을 편견 없이 꿰뚫어 보는 유일한 존재다. 문상민은 감정 표현이 적고 서툰 경록을 완벽히 소화하기 위해 이종필 감독과 수차례 새벽 미팅을 가지며 인물의 결을 깎고 다듬었다. 그의 맑고 투명한 눈빛은 심미적 자본의 폭력적 논리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응시(Gaze) 그 자체를 상징한다. 경록의 투명함은 관객으로 하여금 미정을 동정의 대상이 아닌, 동등한 실존적 주체로 마주하게 만드는 강력한 윤리적 앵커(Anchor) 역할을 수행한다.
파반느(Pavane)의 리듬: 세상의 폭력적인 속도에 대한 실존적 저항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파반느(Pavane)'의 미학적 기원을 추적하는 것은 이 작품의 주제 의식을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이다. 파반느는 16세기 유럽 귀족 사회에서 유행했던 매우 느리고 장중한 춤곡으로, 공작새(Pavo)의 우아한 동작에서 그 어원이 유래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작곡가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이 1899년 파리 음악원 재학 시절 작곡한 불후의 명곡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Pavane pour une infante défunte)'는 그 처연한 제목 탓에 오랫동안 장송곡으로 오해받아 왔다. 하지만 라벨은 실제로 스페인 궁정에서 한 어린 왕녀가 눈부시게 우아한 자태로 춤추는 모습을 상상하며 이 곡을 썼다고 밝혔다.  
박민규 작가가 원작 소설에서 스페인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그림 〈시녀들(Las Meninas)〉을 차용해 외모 지상주의의 맹점을 통렬하게 찌른 것처럼, 이종필 감독은 라벨의 음악이 지닌 이 느리고 우아한 템포를 통해 현대 자본주의의 폭력적인 속도에 대한 저항을 선언한다. 모든 것이 숏폼 릴스와 알고리즘의 맹렬한 스피드로 소비되고 버려지는 세상에서, 비참하고 초라한 조건 속에서도 결코 내면의 우아함을 잃지 않으려 발버둥 치며 느리게 스텝을 밟는 행위. 이것이 바로 미정과 경록, 그리고 요한이 세상의 폭력에 대항하여 선택한 그들만의 고유한 보폭이다.  
미정은 사회의 시선에 의해 죽은 존재, 즉 '죽은 왕녀'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경록의 사랑과 요한의 연대라는 투명한 응시를 통해 그녀는 다시 숨을 쉬고 자신만의 파반느 무곡을 춘다. 이들의 춤은 화려한 조명 아래서 타인의 박수를 구걸하는 쇼가 아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심해와도 같은 낡은 어항 속에서, 오직 서로의 온기를 나침반 삼아 부유하는 처연하면서도 아름다운 유영이다. 타인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스스로를 소진시키는 속도의 폭력을 멈추고, 나와 내 곁에 있는 단 한 사람의 리듬에 온전히 주파수를 맞추는 것. 영화 〈파반느〉는 가장 고전적이고 느린 이 음악의 형식을 빌려 2026년의 과잉 연결 사회를 향해 가장 급진적인 실존의 템포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타인의 피드백으로 증명되지 않는 삶의 찬란한 무가치에 대하여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파반느〉는 외모와 매력을 자본주의적 자산으로 철저히 환산해 버린 이 가혹한 스코픽 자본주의 사회를 향해 날아든 가장 우아하고 날카로운 비수다. 이종필 감독의 섬세한 카메라와 고아성, 변요한, 문상민의 경이로운 육화는 화려한 메인 쇼윈도 밖, 세상이 외면한 가장 어두운 백화점 지하 창고에서 느리지만 단단하게 발을 내딛는 청춘들의 춤곡을 묵묵히 기록해 냈다.  
타인의 피드백이나 소셜 미디어의 알고리즘으로 증명되지 않는 삶, 시각적 자본으로 소비되지 않는 삶은 과연 무가치한가? 〈파반느〉가 스크린 밖의 우리에게 던진 이 서늘한 질문에 대해, 영화는 세 사람의 눈물겨운 연대와 서로의 영혼을 향한 빛의 헌사를 통해 명징한 해답을 내놓는다. 세상이 규정한 가시성의 법칙이나 E-E-A-T의 권위 지표로는 결코 산출해 낼 수 없는 인간 영혼의 절대적인 부피가 그곳에 굳건히 존재한다고 말이다.  
우리는 모두 스마트폰이라는 거울을 든 채, 24시간 내내 타인의 시선이라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살아가는 디지털 수감자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숨 막히는 감옥의 차가운 벽에 작은 창을 내고, 밤하늘의 쏟아지는 오로라를 함께 바라보며 조용히 곁을 내어주는 존재가 있다면 , 비로소 우리의 삶은 수치심에 갇힌 즉자적 대상에서 자유로운 대자적 주체로 도약할 수 있다. 세상이 비가시적 존재로 규정해 데이터 생태계에서 지워버리려 했던 이들이 자신들만의 고유한 무곡에 맞춰 걸어 나갈 때, 과잉 연결의 피로 속에서 철저히 고립되어 가던 글로벌 시청자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텅 빈 가슴을 두드리는 잊힌 박동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화려한 조명이 꺼진 후, 스크린 너머의 어둠 속에서 조심스럽게 피어오른 이 투명한 자들의 눈부신 반란에, 이제 맹목적인 시각적 허영으로 스스로를 착취해 온 우리가 고요하고 뜨거운 침묵으로 응답할 차례다. 타인의 시선에서 해방된 자들만이 출 수 있는, 가장 느리고 가장 찬란한 생의 파반느가 지금 우리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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