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죽였다 넷플릭스 드라마/평범한 지옥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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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림
By 이태림 기자

불편함이 내 뒷통수를 후려칠 때

[magazine kave=이태림기자]

한국 장르 드라마 판에서 이런 제목은 좀처럼 보기 어렵다. '당신이 죽였다'라는 말은 대놓고 누군가를 겨눈 손가락 같다. 마치 아서 밀러의 '모두가 나의 아들'처럼 집단적 책임을 묻는 고발장이자, 아가사 크리스티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처럼 모두가 용의자인 세계를 선언하는 것 같다. 넷플릭스 리미티드 시리즈 '당신이 죽였다'는 바로 그 문장을 그대로 들고 와, 8부작 내내 한 사람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에게 차례대로 겨눈다. 가해자와 피해자, 가족과 이웃, 직장 동료와 공권력까지, 누구도 예외 없이 그 질문 앞에 세운다. 방관자는 없다. 모두가 공범이다.

이야기의 시작점은 조은수(전소니)다. 은수는 대형 매장에서 일하는 평범한 판매사원이다. 하루하루 진상 손님을 상대하고, 팀장에게 눈치 보며, 언젠가 더 나은 삶을 꿈꾸지만 구체적인 미래가 그려지지는 않는 청춘이다. 마치 카뮈의 '시지프스'처럼 매일 바위를 밀어 올리지만, 저녁이면 다시 제자리로 굴러 떨어지는 삶. 어느 날 매장에서 고가 시계 하나가 반품 과정에서 감쪽같이 사라지면서 문제가 터진다. 그 사건을 전후해, 어딘가 낯선 기운을 풍기던 손님 진소백(이무생)의 행동이 자꾸 마음에 걸리고, 은수는 CCTV와 기억을 더듬어 그를 쫓아 나선다.

그 와중에 은수의 사적인 삶도 서서히 드러난다. 오랜 시간 남편의 폭력을 견뎌 온 엄마, 그 폭력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고 살아가는 가족의 분위기, 집 안에 배어 있는 공포와 체념이 은수의 표정 위로 겹친다. 겉으로는 웃고 떠드는 영업직원이지만, 몸이 먼저 움찔하는 트라우마가 그의 일상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은수에게 폭력은 뉴스 속 범죄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익숙했던 공기 같은 것이다. 베셀 반 데어 콜크가 말한 '몸이 기억하는 트라우마'가 바로 이런 모습이다. 머리로는 잊었다 해도, 몸은 여전히 그날의 공포를 생생히 기억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은수는 한때 가장 친했던 친구 조희수(이유미)를 오랜만에 찾아간다. SNS 속 사진만 보면 그야말로 '성공한 친구'다. 부유한 남편과 결혼해 멋진 집에서 살고, 동화작가로서도 어느 정도 이름을 알렸다. 인스타그램의 필터 세계에서 그는 완벽한 삶의 증거처럼 보인다. 하지만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은수가 마주한 현실은 정반대다. 잘 차려입은 집 안에는 부서진 그릇과 바닥에 떨어진 물건들이 널려 있고, 희수의 얼굴은 멍과 상처로 뒤덮여 있다. 깔끔한 옷과 화장으로 겨우 감춰온 폭력이 한순간에 들통 나는 장면이다. 마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화가 감춰진 다락방 문을 연 것처럼, 겉과 속의 괴리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괴물은 양복을 입고 출근한다

희수의 남편 노진표(장승조)는 처음에는 다정한 남편처럼 등장한다. 말도 잘하고 사회적 지위도 높고, 밖에서는 매너 좋고 능력 있는 남자로 통한다. 패트릭 베이트먼이 '아메리칸 사이코'에서 명함 디자인을 논하듯, 그는 사회적 가면을 완벽하게 착용한다. 하지만 집 안에서 그는 완벽한 괴물이다. 술에 취하면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폭력을 휘두르고, 폭행 이후에는 비싼 가방과 목걸이로 사과하며 희수의 귀를 막는다. 그리고 이런 폭력의 흔적을 덮는 데에는 시댁 식구들과 주변 사람들의 '눈감아 주기'가 적극적으로 동원된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은 여기서 '악의 사회성'으로 진화한다. 괴물은 혼자 만들어지지 않는다. 수많은 공범이 함께 키워낸다.

은수는 이 현실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다만 그 충격은 단순한 놀라움이 아니라, 어린 시절 엄마가 맞던 장면들과 겹쳐지는 기시감에 가깝다. 희수의 집에서 들려오는 고성과 물건 부딪히는 소리가, 과거 자신의 집에서 들리던 소리와 똑같이 들린다. 마치 프루스트의 마들렌 과자처럼, 소리는 시간을 초월해 트라우마를 소환한다. 은수는 처음에는 경찰에 신고하자고, 같이 도망치자고, 주변에 알리자고 말한다. 하지만 희수는 늘 마지막 순간에 발을 뺀다. 남편이 더 화를 낼까 봐, 아이들이 눈에 밟혀서, 그리고 이미 수차례 탈출에 실패한 경험 때문에 몸이 먼저 굳어 버리기 때문이다. 학습된 무기력이라는 심리학 개념이 드라마적 현실로 구현되는 순간이다.

탈출구인가, 자살골인가: 살인이라는 선택

결국 어느 날, 희수는 모든 힘이 빠져나간 얼굴로 스스로 삶을 포기하려 한다. 그 순간 은수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이 이 드라마의 출발점이다. "죽여버리자, 네 남편." 그 말은 충동이 아니다. 아이 때부터 폭력의 피해자였던 은수, 지금 이 순간 또 다른 피해자인 희수, 그리고 그들 뒤에 줄지어 선 수많은 이름 없는 피해자들을 떠올린 끝에 나온 극단적인 선택이다. 이들은 단지 나쁜 사람을 처벌하겠다는 복수심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막막함이 살인을 현실적인 탈출구로 만들어 버린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죽이며 자문했던 것처럼, 그들도 묻는다. "이(異)를 제거하는 것이 정의인가, 범죄인가."

두 사람은 완전 범죄를 계획하기 시작한다. 진표의 일상 동선과 습관을 분석하고, 사고처럼 보일 만한 상황을 구상하고, 범행 이후의 알리바이까지 치밀하게 계산하려 한다. 마치 히치콕의 '로프'나 '완전한 타인들'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완전 범죄를 시도하는 서스펜스가 펼쳐진다. 이 과정에서 은수는 아까 시계 사건의 중심에 있던 남자 진소백을 떠올린다. 겉보기에는 능글맞고 가벼운 사장처럼 보이지만, 상황 판단과 사람 보는 눈이 비상한 인물이다. 은수와 희수는 소백의 가게에서 일하는 직원을 계획에 끌어들여, 진표의 시간표와 차량, 주변 CCTV까지 차근차근 파고든다.

하지만 준비가 아무리 완벽해 보여도 현실은 늘 계획과 다르게 흐른다. 진표의 폭력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심해지고, 경찰이나 주변 사람들은 여전히 '부부 싸움' 정도로 치부한다. 은수와 희수는 어느 밤,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게 되고, 그 직후부터 이들의 삶은 새로운 지옥으로 접어든다. 범행의 흔적을 지우고, 수상한 시선을 피해 움직여야 하며, 예상치 못한 인물들이 하나둘 등장해 퍼즐을 뒤흔든다. 진표의 여동생 노진영, 경찰, 그리고 진소백의 정체까지, 회차가 거듭될수록 진실은 더 복잡한 모양을 드러낸다. 드라마는 마지막까지 살인의 도덕성보다, 그 선택에 이르기까지의 길과 그 이후의 책임을 집요하게 묻는다. 결말이 주는 정서는 직접 확인하는 편이 좋다. 이 작품은 반전보다 과정에 더 무게를 두기 때문이다.

구조가 만든 괴물, 구조가 막은 탈출

이제 이 작품이 어떤 힘을 지니고 있는지, 왜 보는 내내 불편하면서도 눈을 떼기 힘든지 살펴보자. '당신이 죽였다'가 가장 과감한 지점을 택한 부분은 가정폭력을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구조와 환경이 키워낸 결과로 다룬다는 점이다. 보통 폭력은 한 사람의 광기나 분노 조절 장애 정도로 축소되기 쉽다. 마치 사과 한 알이 썩었다고 말하듯, 개인의 일탈로 치부한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진표의 폭력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그 폭력에 침묵하거나 동조한 사람이 누구인지, 폭력의 현장을 알고도 모른 척한 이들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사과 한 알이 아니라 나무 전체, 과수원 전체, 유통 시스템 전체를 검사하는 것이다.

제목 '당신이 죽였다'는 그래서 여러 층위로 읽힌다. 직접 주먹을 휘두른 진표 같은 가해자를 향한 말이기도 하지만, 그를 끝까지 감싸며 '가정사'라며 넘긴 가족들을 향한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또, 폭행 장면을 보고도 외면한 이웃, 신고를 무력화한 권력자, "왜 도망치지 않았냐"는 말만 반복하며 피해자를 탓한 주변인 모두에게 날아가는 문장처럼 들린다. 영어 제목 'As You Stood By'가 담고 있는, 그저 옆에 서서 지켜보기만 했던 자들의 책임을 다시 묻는 표현과도 자연스럽게 겹친다. 에드먼드 버크가 말한 "악이 승리하기 위한 유일한 조건은 선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는 경구가 드라마적 현실로 구현된다.

연출은 이 메시지를 과장된 설교 대신, 세밀한 장면으로 스며들게 한다. 카메라는 폭력의 순간을 잔혹하게 소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폭력이 끝난 뒤의 침묵, 산산이 부서진 식탁 위 그릇들, 욕실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 손이 덜덜 떨리는 희수의 클로즈업을 오래 잡아 둔다. 폭력의 스펙터클보다, 그 후에 남은 공포와 수치, 무력감을 보여주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마치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말한 "가장 무서운 것은 괴물이 아니라 괴물을 본 사람의 눈빛"처럼, 이 드라마는 폭력 자체보다 폭력의 여파를 응시한다. 덕분에 시청자는 자극적인 장면을 소비하는 관객이 아니라, 누군가의 지옥을 훔쳐보는 목격자로 자리하게 된다. 그리고 목격자는 결코 방관자일 수 없다. 본 순간, 우리는 이미 공범이다.

배우들의 연기는 이 드라마의 절반 이상을 책임진다. 조은수라는 인물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선에 선 인물이다. 어릴 적부터 폭력을 보고 자란 피해자이지만, 이제는 친구를 위해 살인을 계획하는 능동적인 행위자가 된다. 전소니는 그 복합적인 위치를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게 구현한다. 겉으로는 무심한 척 농담을 던지다가도, 특정 소리에 몸이 먼저 움찔하고, 분노를 참지 못해 벽을 주먹으로 치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차갑게 머리가 돌아가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넘나든다. 마치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역할에 빙의하듯, 그는 조은수라는 존재 자체가 된다. 그 덕분에 시청자는 은수의 선택을 쉽게 판단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 마음을 따라가게 된다.

조희수라는 캐릭터는 학대 피해자의 심리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유미는 특유의 순한 얼굴과 눈빛을 활용해, 동시에 부서지기 쉬운 유리와 같은 이미지와, 마지막까지 삶을 붙들고자 하는 끈질김을 함께 보여준다. 희수는 분명 '도망치지 못한 피해자'이지만, 이 드라마는 그를 답답한 인물로 소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왜 도망칠 수 없었는지, 도망치는 동안 무엇을 잃게 되는지, 현실적인 장벽들을 하나씩 펼쳐 놓으며 그 무력감의 구조를 이해하게 만든다. 집이 감옥이 되는 순간, 탈출은 단순히 문을 여는 행위가 아니라 삶 전체를 버리는 결단이 된다.

노진표라는 악역도 일차원적인 괴물이 아니다. 장승조는 겉으로는 세련되고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하면서, 눈빛 하나로 공포를 만든다. 그는 폭력을 저지르고 난 뒤 꼭 선물을 쥐여 주거나, "그래도 너밖에 없다"고 속삭인다. 그 모습은 현실에서 수없이 보고 들었던 가정폭력 가해자의 전형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이따금 진심처럼 보이는 죄책감과 다정함이 스쳐 지나가기에, 시청자 역시 순간적으로 혼란을 느낀다. 바로 그 혼란이 피해자를 다시 가해자의 품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기제라는 점을 드라마는 똑똑히 짚어낸다. 가스라이팅의 메커니즘을 연기로 구현한 무서운 성취다.

진소백은 흥미로운 완충재다. 겉모습은 허세 많고 장사 수완 좋은 사장님에 가깝지만, 그는 어느 순간부터 은수와 희수의 비밀을 눈치채고 이 비극의 한가운데로 들어온다. 완전히 선한 인물도, 완전히 악한 인물도 아니다. 이익과 양심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인물이고, 그만큼 현실적이다. 마치 '펄프 픽션'의 윈스턴 울프처럼, 문제 해결사이면서 동시에 도덕적 회색지대에 사는 인물. 소백을 통해 드라마는 질문을 던진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가. 얼마나 개입해야 하고, 어디까지 눈을 감을 수 있는가.

완벽하지 않은 야심의 흔적들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8부작이라는 틀 안에서 과거와 현재, 범죄 스릴러와 사회 고발, 캐릭터 드라마까지 한 번에 다 잡으려다 보니, 몇몇 서사는 빠르게 지나간다. 특히 희수의 작가 커리어, 은수의 직장 내 위치, 진표 가족의 정치적 배경 등은 조금 더 파고들었으면 훨씬 입체적인 드라마가 되었을 법한 소재들이다. 후반부에는 수사와 반전에 비중이 쏠리면서 초반에 쌓아 둔 극도의 현실감이 살짝 장르적 편의에 밀리는 순간도 있다.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보면 메시지와 몰입도를 동시에 잡으려는 시도가 나름 균형을 이룬 편이다. 완벽한 작품은 아니지만, 완벽하지 않기에 더 인간적이다.

색감과 미장센은 취향을 좀 탈 수 있다. 집 안은 지나치게 깔끔하고, 상처와 멍을 숨기기 좋은 조명이 깔려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어떤 장면에서는 넷플릭스 특유의 선명한 색감이 폭력과 공포를 다루는 톤과 어긋나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자잘한 미스매치는 결국 배우들의 눈빛과 호흡에 묻혀 버린다. 관객은 화면의 색보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 담긴 공포와 결심에 먼저 반응하게 된다.

장르물에서 사람의 얼굴과 감정이 더 중요하다고 느끼는 관객이라면 '당신이 죽였다'에 깊게 빠져들 가능성이 크다. 이 드라마의 진짜 클라이맥스는 살인 장면이 아니라, 그 직전과 직후 인물들의 표정과 호흡에 있기 때문이다. 누가 옳고 그른지를 재판하듯 따지는 대신, 인물의 심리를 따라가며 함께 고민해 보고 싶은 사람에게 적합한 작품이다. 마치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읽으며 라스콜리니코프와 함께 방황하듯, 은수와 희수의 여정을 따라가게 된다.

사회 문제를 다루는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가정폭력, 방관, 2차 가해 같은 단어에 이미 피곤함을 느낄 수도 있지만, '당신이 죽였다'는 이 개념들을 추상적인 담론이 아니라 캐릭터의 구체적인 삶과 선택 안으로 끌고 들어온다. 그래서 더 아프고, 동시에 더 설득력 있다. 폭력을 둘러싼 수많은 구조적 장벽을 드라마 한 편이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앞으로 뉴스에서 비슷한 사건을 볼 때 "왜 그냥 안 나왔지?"라는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하게 만드는 힘은 있다. 공감의 근육을 키우는 드라마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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