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이브매거진=최재혁 기자 가난이 일상인 조선 말, 허름한 주막 마당에 소년 하나가 쪼그리고 앉아 있다. 남루한 옷자락, 손에는 밥그릇 대신 숯 조각. 장승업(최민식)은 먹을 걸 얻는 대가로 주인집 아이 얼굴을 종이에 그려 준다. 숯으로 몇 번 휙휙 긋는 것만으로 살아 숨 쉬는 눈빛과 볼살이 튀어나온다. 사람들은 입을 떡 벌리고, 소년은 쑥스러운 듯 웃음을 감춘다. 영화 '취화선'은 이 작은 장면에서 이미 모든 걸 압축한다. 신분은 천민, 그러나 재능은 신을 조롱할 수준. 이 기묘한 조합이 곧 한 시대를 뒤흔들 '광기 어린 천재 화가'의 프롤로그다.
승업의 재능은 우연히 양반 출신 포목상 김병문(안성기) 눈에 걸린다. 그는 그림을 알아보는 안목을 가진 인물로, 소년을 집으로 데려와 글자와 그림, 먹과 종이의 우주를 열어 준다. 마치 RPG 게임에서 숨겨진 천재 캐릭터를 발견한 것처럼. 병문이 깔아 준 무대 위에서 승업은 폭발적으로 레벨업한다. 스승 없이도 옛 대가들의 화풍을 자기 식으로 리믹스하고, 산수와 인물, 화조를 넘나들며 장르를 씹어 먹는다. 술에 취한 채 부엌 바닥에 엎드려서도, 마당 처마 밑에 기대앉아서도 붓만 잡으면 세계가 리셋된다. 남들은 며칠 걸릴 대작을 그는 단숨에 스피드런처럼 완성해 버린다. 화면은 그 호흡을 따라 붓끝과 종이의 질감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포착한다.
천재의 이름은 금세 입소문을 타고 조정과 양반가, 상인들 사이에 퍼진다. 승업은 궁중 화원으로 스카우트돼 어좌 뒤 장식화를 그리고, 권세가들의 사랑방 병풍을 제작한다. 그가 붓을 드는 곳마다 돈과 명예가 마그넷처럼 달라붙는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천민 출신 화공에게 허락되는 건 어디까지나 장식품 생산자의 포지션일 뿐, 진짜 예술가로 존중받는 자리는 끝내 404 에러다. 술상머리에서는 그의 작품을 두고 한참 떠들다가도, 막상 자리 배치할 땐 승업을 머슴처럼 부르고 무시한다. 마치 유튜브 뮤지션이 아무리 조회수를 찍어도 클래식 콘서트홀에 못 들어가는 것처럼.
그 틈새에 등장하는 인물이 기생 진홍(김여진)이다. 붉은 치마폭 사이로 번쩍이는 눈빛을 가진 이 여인은 승업의 재능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채고, 동시에 그의 상처를 가장 깊이 엑스레이로 찍어내는 사람이다. 술집 구석에 놓인 종이 위에 꽃을 그리던 승업을 보며 진홍은 묻는다. 왜 이렇게까지 술에 기대야만 붓을 잡느냐고. 승업은 대답 대신 술잔을 원샷하고, 닿을 듯 말 듯한 관계가 두 사람 사이에 레이어로 쌓인다. 진홍은 승업에게 세속적 안정을 제안하지만, 그는 예술과 방랑, 술과 자존심 사이에서 번번이 그걸 스와이프 왼쪽으로 밀어낸다. 사랑은 계속 엇박자를 타고, 대신 그림이 남는다.

한편 세상은 격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서양에서 밀려온 문물과 사상이 조선을 두드리고, 위정자들은 위기를 눈치채지 못한 채 자리 싸움에만 올인한다. 승업이 술판에서 조우하게 되는 청년 선비들은 나라의 미래를 두고 격렬한 디베이트를 벌인다. 개화론자는 서양 문물을 주장하고, 보수파는 유교 질서를 붙들어야 한다고 맞불을 놓는다. 승업은 그런 토론에 끼어들 만큼 인텔리는 아니다. 대신 술에 취한 채 강가에 서서, 기울어가는 달과 부서지는 물결, 거친 바람에 휘어진 갈대를 붓으로 스케치한다. 그에게 시대의 격변은 말과 논리가 아니라 눈앞의 풍경과 몸에 새겨지는 기운, 일종의 체감 온도다.
영화는 승업의 인생을 몇 개의 스냅샷으로 잘라 보여 준다. 권력자의 병풍을 그리는 순간, 서양인의 초상화를 보며 낯선 명암법에 멘붕하는 순간, 가난한 농부네 집에서 아이 얼굴 그려 주며 특유의 장난기 어린 웃음을 되찾는 순간. 그리고 늘 그 뒤를 스토킹하듯 따라오는 건 술과 폭발, 그리고 후회다. 승업은 술 없이는 그림 앞에 서기 두려워하고, 술 마신 뒤에는 자기가 그린 작품조차 발로 걷어차고 찢어 버린다. 자신이 창조한 최고 걸작을 스스로 디스트로이하는 장면은 관객 입장에서도 보기 고통스럽다. 그러나 승업에게 그건 일종의 자기 검열이자 자기 파괴. 더 나은 선을, 더 낯선 조화를, 더 살아 있는 붓질을 찾기 위한 미친 실험이다. 마치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 프로토타입을 수십 번 폐기한 것처럼.
이렇게 영화는 장승업이라는 한 인간의 삶을 트래킹하면서도, 그 삶을 통해 조선 말이라는 시대 전체의 파노라마를 동시에 그려 낸다. 궁궐과 양반가의 화려한 실내, 서민들이 들고 다니는 초라한 병풍, 장터와 기생집, 들판과 강가. 승업이 어디 서 있든 그 배경은 늘 캔버스가 된다. 마치 화면 속 모든 장면이 그의 눈에 비친 구글 포토 라이브러리인 것처럼. 결말에서 승업이 어디로 사라지는지는 스포 방지 차원에서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영화가 끝날 때쯤 관객은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이 사람에게 중요한 건 살아남는 것도, 이름 남기는 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저 붓을 들고 있다는 행위 자체가 그의 삶이자 저항, 일종의 익스텐셜한 선언이었다는 것을.

임권택 감독의 최고 작품 ‘취화선’
'취화선'의 가장 큰 미덕은 전기 영화이면서도 인물의 일대기를 위키피디아처럼 나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임권택 감독은 장승업의 생애를 연대기 순으로 줄 세우는 대신, 그의 삶을 구성하는 몇 개의 에센스를 붙잡는다. 술, 붓, 바람, 불, 그리고 얼굴들. 이 다섯 가지를 중심축으로 장면들을 배치하며 관객에게 한 인간의 궤적을 역추적하게 만든다. 그래서 영화는 템포가 느린 듯 보이지만, 한 장면 한 장면이 모두 승업의 내면을 향해 다가가는 점프숏이다.
가장 압도적인 요소는 비주얼이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끝내 그림을 추적하면서도 결코 단순 복사에 머무르지 않는다. 산수화 씬을 보면 확실하다. 붓끝에서 뻗어나간 먹선이 봉우리와 골짜기를 만들면, 카메라는 그 그림의 산을 그대로 연장하듯 실제 산 능선을 패닝한다. 반대로 강가의 안개와 갈대숲을 촬영한 뒤, 그 위에 오버랩되는 건 승업이 감각한 선과 점의 발레다. 이 핑퐁이 반복되면서 관객은 어느 순간 그림과 현실의 경계가 디졸브되는 걸 경험한다. 승업에게 세상은 그 자체로 거대한 스케치북이고, 영화는 그 스케치북을 IMAX 스크린 위에 다시 펼치는 작업에 가깝다.
색채 팔레트도 아주 의도적이다. 대부분 장면은 먹빛에 가까운 탁한 색과 흙빛이 도미넌트하다. 천민 출신 화가, 가난한 조선, 술과 아편 냄새가 뒤섞인 방안의 공기가 그대로 스며든다. 그런데 그 속에서 갑자기 청색이 선명하게 터진다. 고목에 걸린 새의 깃털, 연못 위 달빛, 진홍의 치마 끝자락, 그리고 무엇보다 붓이 지나간 종이 위 색들. 이 컬러 콘트라스트 덕분에 승업의 그림은 영화 속에서 단순한 프롭이 아니라 현실을 해킹하고 나오는 또 하나의 디멘션처럼 느껴진다.
연출의 리듬은 슬로우 모션과 익스플로전의 교차다. 술상을 둘러싼 긴 대화 씬에서는 거의 무대극처럼 롱테이크를 사용해 인물들의 미세 표정을 관찰한다. 침묵이 길어지고 허탈한 웃음과 신경질적인 농담이 오갈 때, 관객은 마치 그 술자리에 같이 앉아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러다 승업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붓을 잡거나, 병풍을 발로 걷어차고, 방바닥에 물을 뿌려가며 미친 듯이 선을 긋기 시작하면 영화는 폭발적 몸동작과 함께 터보 모드로 전환된다. 이 느리다 빠른 BPM이 반복되면서 관객은 어느새 승업의 호흡과 심박수를 싱크하게 된다.
연기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장승업 역할의 최민식은 이 영화에서 그야말로 육체를 다 바쳐 그림을 그리는 사람처럼 보인다. 샤프를 잡듯 가볍게 붓을 쥐는 게 아니라, 거의 칼부림하듯 온 힘을 실어 선을 긋는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다가도 붓 잡는 순간 척추가 펴지고 눈빛이 LED처럼 켜지는 순간들이 특히 소름 돋는다. 말보다 몸으로, 술 냄새와 땀, 붓질로 감정을 쏟아내는 사람의 얼굴을 완전히 다운로드해낸다. 안성기가 연기한 김병문은 그 반대편 폴에 서서 영화의 밸런스를 잡아 준다. 세상과 타협할 줄 알면서도 승업의 그림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는 이 묵직한 친구는 예술가와 시대 사이의 브리지 같은 존재다. 두 배우의 대척점이 만들어내는 텐션이 영화 전체를 지탱한다. 마치 비틀즈에서 레논과 매카트니의 케미처럼.

인물의 다양한 모습 통해 ‘우리 삶’ 비춘다
'취화선'이 흥미로운 지점은, 예술가를 신화화하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위대함의 포지션으로 올려놓는 태도다. 영화 속 장승업은 누가 봐도 결코 '착한 사람'은 아니다. 폭력적이고 무책임하며 사랑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 그럼에도 관객은 그의 붓질 앞에서 자동으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그가 세상과 타협하지 못하는 방식이 때로는 주변인에게 데미지를 입히지만, 바로 그 불화 덕분에 이전에 없던 그림이 스폰된다. 임권택 감독은 이 모순을 있는 그대로 스캔한다. 예술가를 도덕의 잣대로 심판하기보다, 그가 몸부림치는 프로세스 자체를 역사와 링크시켜 보여 준다. 마치 베토벤이 귀머거리였다고 해서 9번 교향곡의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시대 배경 역시 핵심 변수다. 조선 말의 혼란과 서구 문물의 침투, 신분제도의 균열은 모두 승업의 붓끝에 임팩트를 미친다. 영화는 이를 굳이 긴 내레이션으로 풀지 않는다. 대신 병문이 서양식 양복을 입는 씬, 승업이 서양인의 초상을 보며 낯선 명암 표현에 충격받는 씬, 학자들이 모여 개혁을 토론하는 씬들을 루즈하게 이어 붙인다. 관객은 이 조각들을 퍼즐처럼 맞춰 시대를 디코딩하게 된다. 그 위에서 승업의 그림은 일종의 허브 역할을 한다. 한쪽엔 오래된 동양화의 트래디션이, 다른 한쪽엔 새로운 시대의 기운이 놓여 있고, 승업은 그 사이에서 선과 색을 믹싱해 본다. 그래서 그의 산수화에는 전통적인 여백과 동시에 어떤 불안한 글리치가 공존한다.
영화 타이틀 '취화선'도 의미심장하다. 술 취할 취, 그림 화, 부채 선. 술에 취해 부채 위에 그림을 그린다는 뜻이면서, 동시에 술과 예술, 그리고 부채처럼 얇고 쉽게 찢어질 수 있는 인생의 메타포로 읽힌다. 승업은 술에 취해야만 그림의 신에게 접속할 수 있는 인간이다. 하지만 그 술이 곧 그를 디스트럭션하는 바이러스가 되기도 한다. 제목은 이 양가성을 원샷에 품고 있다. 뷰티와 디스트럭션, 크리에이션과 셀프 디스트럭션이 한 줄기 선 위에서 밸런스를 탄다는 사실을. 마치 고흐가 해바라기를 그리면서 동시에 귀를 자른 것처럼.
대중성 측면에서 보면 '취화선'은 결코 이지 모드 영화는 아니다. 전형적인 3막 구조 대신 기억과 장면의 프래그먼트가 이어지는 구성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리플레이 가치가 높은 영화이기도 하다. 첫 관람 때는 승업의 광기와 붓질에 압도되고, 두 번째 볼 때는 병문과 진홍, 서브 캐릭터들의 표정과 선택이 다르게 보인다. 세 번째에 이르면 배경으로 흘러가던 산과 물, 바람과 하늘이 그림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이스터에그가 보이는 영화, 바로 그런 작품이 클래식으로 살아남는다. 마치 '블레이드 러너'처럼.
당신의 삶이 고통스럽다면...
예술가의 삶을 다룬 영화들, 특히 고통과 천재성을 한데 묶어 신화처럼 소비하는 이야기에 지친 사람이라면 '취화선'이 주는 뉘앙스가 신선하게 와닿을 것이다. 이 영화는 장승업을 신적 존재로 신격화하지도, 반대로 쓰레기 인간으로 끌어내리지도 않는다. 대신 술에 젖은 손으로도 끝내 붓을 놓지 못하는 한 사람의 공허함과 집요함을 끝까지 바라보게 만든다. 그 시선이 관객에게 묵직한 리스펙트의 감각을 남긴다. 마치 마일스 데이비스의 재즈를 듣고 나서 느끼는 그 감정처럼.
한동안 무언가를 크리에이트한다는 일 자체가 버겁게 느껴졌던 이들에게도 이 영화는 이상한 위로를 건넨다. 승업의 삶은 영광과 실패, 인정과 조롱, 사랑과 상실이 뒤섞인 연속이다. 그럼에도 그는 매번 다시 종이 앞에 앉는다. 퍼펙트하지 않아도, 어제 찢어 버렸던 그림과 비슷해 보여도, 다시 선을 그어 본다. 그 과정에서 관객은 아주 조용한 용기를 배운다. 대단한 결과물이 아니라 오늘도 무언가를 그려 보는 행위 자체가 삶을 버티게 한다는 사실을. 마치 시지프스가 바위를 밀면서도 미소 짓는 것처럼.
한국 영화의 다른 스펙트럼을 보고 싶은 관객에게도 '취화선'은 좋은 픽이다. 화려한 장르 영화나 빠른 서사 대신 먹빛과 여백, 붓질과 침묵으로 두 시간을 채우는 영화가 여전히 파워풀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기 때문이다. 스크린 속 풍경을 바라보다 보면 어느새 자신이 앉아 있는 극장의 어둠마저 한 폭의 수묵화 여백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런 경험을 한 번이라도 해 보고 싶다면, 술과 그림, 그리고 한 인간의 불꽃 같은 생애가 뒤엉킨 이 작품을 천천히 스트리밍해 볼 만하다. 단, 팝콘은 필수가 아니다. 오히려 한 잔의 막걸리와 함께 보면 더 좋을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