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태워줘요..‘영화 잉여들의 히치하이킹’

schedule 입력:
최재혁
By 최재혁 기자

타인의 고생이 내게 웃음으로 18회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

|케이브매거진=최재혁 기자 비행기 탑승구 앞, 큰 캐리어 대신 낡은 배낭 몇 개와 카메라 가방 하나. 스스로를 '잉여'라고 호명하는 네 친구 호재(이호재), 하비(하승엽), 현학(이현학), 휘(김휘)는 그렇게 유럽행 비행기에 몸을 투하한다. 통장에 남은 건 80만 원과 손에 쥔 건 캠코더 한 대. 그들이 수립한 계획은 단순하면서도 무모하다. "호스텔 홍보 영상을 찍어 줄 테니, 우리에게 숙식과 약간의 돈을 달라." 1년 동안 유럽을 순회하며 이런 물물교환을 반복하고, 마지막에는 뮤지션을 찾아 뮤직비디오까지 완성해 오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완성해 극장에서 상영하는 것. 마치 '이터널 선샤인'을 거꾸로 재생하듯, 기억을 만들기 위해 먼저 카메라를 켜는 셈이다. 영화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은 바로 그 계획의 발화점에서 시작한다.

네 사람은 영화과에서 같이 어울리던 동기다. 학교에서는 '실속 없는 애들' 취급을 받았고, 늘 등록금과 생계 사이에서 허덕였다. 촬영 알바를 해도 등록금의 절반도 충당하지 못하자, 이들은 아예 다른 선택을 한다. "등록금 벌어서 학교로 복귀할까, 아니면 그냥 한 번 제대로 말도 안 되게 해볼까." 그리고 결국 후자를 택한다.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는 20대의 무모함을, 그들은 몸으로 실천하기로 한다. 이는 마치 '비포 선라이즈'의 제시와 셀린이 기차에서 내렸듯, 계산된 합리성을 버리고 직관의 손을 잡는 순간이다.

그러나 파리에 착륙한 순간부터 계획은 조금씩 균열된다. "홍보 영상 찍어 줄게, 대신 재워 달라"는 제안에 흔쾌히 응하는 호스텔은 거의 없다. 이메일을 발송해도 답이 없고, 직접 찾아가도 문전박대당하기 일쑤다. 카메라는 그런 좌절의 얼굴을 무자비하게 포착한다. 노트북을 사이에 두고 마감 직전의 계좌 잔고를 응시하는 네 사람, 길거리 벤치 위에서 '그래도 재밌지 않냐'며 스스로를 위무하는 농담, 밤이 되면 부쩍 조용해지는 표정. 여행기에서 흔히 보는 "와, 파리다!" 같은 감탄 대신, 이 영화는 파리의 습기 찬 새벽 공기와, 호스텔 복도를 배회하는 청년들의 뒷모습을 길게 응시한다. 마치 '로스트 인 트랜슬레이션'이 도쿄를 외로움의 무대로 재해석했듯, 이 영화는 파리를 낭만이 아닌 생존의 전선으로 재배치한다.

젊은 날, 청춘이니 고생하기?

몸과 마음이 고갈될수록, 애초에 짜둔 플랜은 점점 무력해진다. 네 친구는 결국 남쪽 이탈리아로 하강하며 '히치하이킹'이라는 또 하나의 무모한 기술을 소환한다. 도로 위에서 엄지를 들어 올리고, 간신히 정차한 차에 몸을 압축시켜 넣는다. 차 안에서는 낯선 나라 말과 손짓, 그리고 서툰 영어가 뒤엉킨다. "우리는 한국에서 온 영화쟁이들"이라는 소개를 수십 번 반복하면서, 이들은 조금씩 여행자의 얼굴을 벗고 '길 위의 노동자', 마치 '노매드랜드'의 프란시스 맥도먼드처럼 같은 표정을 장착하게 된다. 잠은 대충 해결해도 배고픔은 위장할 수 없기에, 식재료를 아끼거나 아예 단식하는 날들이 누적된다. 추위와 피로 때문에 카메라를 아예 한 달 가까이 동결시키는 구간도 등장한다. 이 공백은 화면 속에서 고스란히 '침묵'으로 남는다.

그러다 마침내 첫 번째 거래가 성사된다. 어느 호스텔에서 그들의 제안을 수용한 것이다. 네 사람은 눈이 발광한다. 방을 탐사하고, 로비를 촬영하고, 손님들의 인터뷰를 채집하며 자신들이 상상했던 '홍보 영상'을 구축해 나간다. 이때의 화면은 유난히 활력이 과잉된다. 자신들이 준비해 온 기술과 장비가 처음으로 제 기능을 발화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 영상이 입소문을 전파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유럽 곳곳의 호스텔에서 연락을 수신하게 된다. 아직도 돈은 없지만, 적어도 잠들 곳은 확보된다. 프랑스, 이탈리아, 터키, 영국까지 계속해서 새로운 도시와 호스텔, 새로운 얼굴들이 카메라에 아카이빙된다. 영화는 엽서처럼 예쁜 풍경보다, 주방에서 함께 밥을 조리하고, 로비에서 기타 치며 합창하는 순간들, 체크인 카운터 뒤에서 머리를 싸매고 편집하는 장면들을 더 길게 포획한다. 이는 '셰프'(2014)가 푸드트럭을 통해 가족을 재발견했듯, 그들도 노동을 통해 공동체를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이 단순한 무전여행 자랑으로 종결되지 않는 이유는, 이 여정 속에 균열과 갈등을 은폐하지 않기 때문이다. 돈이 바닥났을 때, 촬영을 계속해야 하는지 귀환해야 하는지 두고 충돌하는 장면, 서로의 몫을 두고 불만을 폭발시키는 순간, 기대만큼 잘 풀리지 않는 현실 앞에서 "우리가 지금 뭐 하는 거지?"라고 자문하는 대화들이 카메라에 아카이빙된다. 때로는 촬영을 담당한 사람의 시선이 의도적으로 싸움을 회피하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 가까이 다가가 누군가의 눈물을 무자비하게 포착하기도 한다. 마치 지진계의 바늘이 요동치듯한 모습이 다큐멘터리의 핵심 동력이다. '버드맨'이 원테이크로 촬영 현장의 혼돈을 담았다면, 이 영화는 파편화된 숏들로 여행의 혼돈을 재구성한다.

여행의 종착역에 이르러, 네 친구는 처음 수립했던 마지막 목표를 상기한다. '뮤직비디오'. 영국의 뮤지션 아르코를 만나 그들을 위한 뮤직비디오를 완성하겠다는 약속. 남은 시간은 단 며칠뿐이다. 장비는 마모되었고, 체력은 고갈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기어코 카메라를 들고 런던 골목을 종횡무진한다. 이 마지막 질주의 결과를 영화는 결말까지 견인하지만, 그 뮤직비디오가 어떤 형태로 완성되는지, 그리고 한국으로 복귀한 뒤 이 영화가 어떻게 세상과 조우하게 되는지는 관객이 직접 확인하는 편이 좋겠다. 중요한 건, 이 365일의 여정이 단지 "우리 잘 놀다 왔어요"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버텼고, 어디까지 충돌해 봤는가"를 보여주는 성장담이라는 사실이다.

대한민국 청춘의 현실을 보고 싶다면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은 겉으로는 유쾌한 로드 다큐멘터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2010년대 초 한국 청년세대의 초상을 날것 그대로 아카이빙한 기록이다. IMF 이후, 소위 '88만 원 세대'라는 명명이 유행하던 시기, '잉여'라는 자기 호명은 단순한 자학 개그가 아니라 일종의 생존 전략이었다. 마치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주인공이 슬럼 출신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무기로 삼았듯, 이 영화는 그 단어를 타이틀에 각인시킨다. "우리는 잉여다." 학교에서도, 노동시장에서도 아직 제대로 정박하지 못한, 유동적인 청춘.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장 멀리, 가장 무모하게 비상할 수 있는 사람들. 이 역설을 네 인물의 표정과 신체를 통해 가시화한다.

형식적으로 보면, 이 작품은 DIY 다큐멘터리의 모범 사례다. 연출자인 호재(이호재)가 카메라 앞과 뒤를 횡단하며 상황을 해설하고, 때로는 자신을 포함한 네 사람의 민낯을 과감히 노출한다. 화면은 종종 진동하고, 노출이 불일치하거나 초점이 이탈하는 장면도 그대로 채택된다. 흔히 말하는 '완성도 높은 영상미'와는 거리가 있다. 대신 현장감이 포화되어 있다. 렌즈에 김이 응결된 새벽, 비를 맞으며 도로 변에서 히치하이킹을 시도하는 장면, 호스텔 좁은 방 안에서 머리를 밀착시키고 편집하는 모습들은 그 거친 질감 덕분에 더 설득력 있게 침투한다. "우리가 있는 그대로 찍는다"는 선언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찍는다"는 태도에 가깝다. 이는 '블레어 위치'나 '파라노말 액티비티'가 파운드 푸티지로 공포를 재발명했듯, 한계를 미학으로 전환시키는 전략이다.

주목할 만한 지점은 카메라의 좌표다. 보통 여행 다큐에서 카메라는 바깥 세계를 겨냥한다. 풍경과 사람, 관광명소를 포획한다. 그런데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에서 카메라는 자주 네 사람 쪽으로 방향을 반전시킨다. 히치하이킹을 도와준 현지인도, 호스텔 주인도 물론 촬영하지만,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결국 이들 자신의 얼굴이다. 힘들어서 짜증 내는 얼굴, 말도 안 되는 농담에 웃다가도 갑자기 진지해지는 순간, "우리 이거 끝까지 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눈에 걸리는 장면들. 이건 단순한 여행 기록이 아니라, 카메라를 통해 자기 자신을 해부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마치 '셜록'에서 왓슨이 블로그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재구성했듯, 이들도 카메라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재조립한다. 그래서 어느 지점에서는 '촬영하는 우리'와 '피사체인 우리'가 충돌한다. 카메라를 종료하고 싶어 하는 사람과 끝까지 가동시키려는 사람의 긴장, 그 틈이 화면에 고스란히 새겨진다.

내용적으로는 청춘 예찬과 청춘 비판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횡단한다. 한편으로 이 영화는 "두려워하지 말고 떠나라, 충돌해 봐라"라고 선언한다. 계획이 완벽하지 않아도, 돈이 충분하지 않아도, 실행하면 길이 개척된다는 메시지가 반복된다. 다큐멘터리 속 네 친구의 웃음과 낙관주의는 실제로 보는 이의 가슴을 좀 진동시킨다. 하지만 동시에 영화는 이 여행이 얼마나 위태로운 선택이었는지도 은폐하지 않는다. 무전여행을 낭만화하면 안 된다는 건, 배고파서 아무것도 못 하고 멍하니 앉아 있는 장면, 감정이 농축되어 폭발하는 순간들이 잘 증명한다. "너희라서 가능했던 거 아니냐"는, 다시 말해 어느 정도의 안전망과 재능, 체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무모함이라는 비판도 충분히 제기될 수 있는 부분이다. 마치 '와일드'의 셰릴 스트레이드가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을 걸을 수 있었던 것도 결국 백인 중산층의 여유 덕분이라는 비판처럼. 영화는 이 비판에 직접 답변하지 않는다. 대신 네 친구의 대화와 표정 속에 그 질문을 그대로 투하해 둔다.

사회적 맥락을 고려하면 이 작품의 의미는 더 선명해진다. 20대 중반, 영화과 출신, 등록금과 미래에 압살된 청년들이 학교를 중퇴하고 1년을 '소각해버린다'는 선택은, 당시 많은 관객에게 충격이자 해방감이었다. 이들은 아무도 허가하지 않은 방향으로 마음껏 기울어져 본다. 실패하더라도 그 실패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겠다는 태도. 이 점이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을 단순한 여행 브이로그와 구획 짓는 지점이다. 이 영화 속 여정은 결국 영화 자체로 귀결된다. 그러니까 이들은 단순히 여행을 한 것이 아니라, "영화 만들기"라는 노동을 다른 대륙으로 이식해 실습한 셈이다. 마치 '보이후드'가 12년에 걸쳐 성장을 기록했듯, 이 영화는 1년에 걸쳐 자기 발견을 기록한다. 유럽의 길 위에서 촬영한 이 다큐멘터리가 실제로 극장에 상영되고, 관객과 조우하게 되는 순간, 그 무모함은 또 다른 의미를 획득한다.

‘잉여’라는 말이 유행하던 때의 청춘물

요즘 20대를 생존하는 사람들, 특히 '나만 뒤처진 것 같다'는 불안에 자주 포위되는 이들에게 이 작품은 묘한 위로가 될 수 있다. 네 친구의 선택이 정답이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정답이 없다는 사실을 신체로 증명하는 과정이다. 계획대로 안 돼도, 중간에 충돌하고 후회해도, 그래도 한 번은 시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화면으로 가시화한다. 그걸 보며 "아, 나만 이렇게 진동하는 게 아니구나"라는 기분을 감지할 수 있다.

또, 콘텐츠를 창조하고 싶은데 선뜻 착수하지 못하고 있는 예비 창작자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이 영화는 엄청난 장비와 자본이 없어도, 치밀한 콘티와 거대한 팀이 없어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일단 촬영하고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물론 네 친구 정도의 체력과 집요함, 그리고 어느 정도의 기술은 필요하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아도 일단 착수한 사람들이 결국 '한 편'을 완성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큰 자극이 된다. 완성도가 아니라 태도가 우선이었다는 점, 그 태도가 결국 완성도로 연결되었다는 점이 이 영화의 핵심이다. 마치 '탱크 걸'이나 '클럭스'처럼, DIY 정신으로 무장한 펑크적 창작물의 계보에 이 영화를 위치시킬 수 있다.

여행을 애호하지만 인스타그램식 '큐레이션된 여행'에 조금 질린 사람에게도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은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여기에는 세심하게 선별된 카페와 전시, 전망대 대신, 차가 정차하지 않는 도로, 예약이 교착된 호스텔, 일정을 파괴하는 비가 있다. 그러면서도 유럽의 도시와 길, 사람들은 여전히 아름답게 침투한다. 단지 엽서가 아니라, 충돌하고 붕괴하고 다시 재건되는 사람들의 배경으로.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아마 이런 질문이 슬쩍 떠오를지도 모른다. "나는 내 20대를, 내 지금을 어디에 어떻게 투자하고 싶은가." 그 질문을 한 번쯤 정면으로 수신해 보고 싶은 사람에게,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은 꽤 솔직한 거울이 되어 줄 것이다. 결국 이 영화가 증명하는 것은 단순하다. 잉여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아직 자신의 방정식을 발견하지 못한 변수들만이 있을 뿐이다.

×
링크가 복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