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역사를 바꿀 수 있을까? ‘드라마 폭군의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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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림
By 이태림 기자

전형적인 폭군을 다시 쓰는 상상력 英 C21인터 드라마 어워드 노미네이트

서울의 한 복합문화공간, 플래시 세례가 쏟아지는 무대 위에서 한 셰프가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다. 프렌치 파인다이닝 세계에서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대회에서 1위를 거머쥔, 한국인 최초의 미슐랭 3스타 셰프 연지영(임윤아). 환호와 샴페인, 축하 인파의 물결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주방에서 타오르는 불과 지글거리는 팬 소리에 더 익숙한 사람이다. 영광의 순간이 채 식기도 전에, 지영은 갑작스러운 사고에 휘말리고, 눈부신 조명이 꺼진 자리에 낯선 어둠이 스며든다. 눈을 뜬 곳은 스테인리스 주방이 아니라, 나무와 흙, 숯불 냄새가 진동하는 조선의 수라간이다.

드라마 '폭군의 셰프'는 이렇게 막을 연다. 현대의 톱 셰프가 조선 시대로 타임슬립해, 최고 미식가이자 최악의 폭군으로 악명 높은 왕 이헌(이채민)을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다. 연지영은 처음엔 꿈이라고 믿으며 ‘이 미친 상황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란다. 하지만 자신이 만든 치킨 한 접시에 눈이 뒤집힌 왕이 그녀를 대령숙수로 임명하면서 상황은 단숨에 뒤집힌다. "맛없는 음식을 올리면 곧바로 사형"이라는 무시무시한 선언과 함께, 지영의 하루는 생존을 건 메뉴 개발 전쟁으로 탈바꿈한다.

조선의 수라간은 프렌치 주방과는 모든 것이 다르다. 계량스푼도, 오븐도, 냉장고도 없다. 대신 장독대와 숯, 가마솥, 육손으로 음식을 다듬는 장인들의 손길이 있다. 지영은 처음에는 "이걸로 요리를 어떻게 해요?"라며 절망하지만, 곧 자신이 가지고 온 것들을 하나씩 꺼내 쓴다. 현대적 위생 개념, 동선 설계, 소스와 재료의 조합, '서비스'라는 혁명적 개념까지. 서양식 소스를 장류와 섞어 새로운 풍미를 창조하고, 남은 재료를 활용해 코스 구성 개념에 가까운 수라를 짠다. 이 과정에서 나이도, 성별도, 출신도 다른 수라간 식구들과 부딪히고, 조금씩 마음을 얻어 간다.

반대편에는 폭군 이헌이 있다. 궁 밖에서는 백성들의 원망과 공포의 대상이지만, 카메라는 그의 사적인 공간까지 침투한다. 그는 절대 미각의 소유자다. 한 숟갈만 떠도 간의 농도와 불 세기, 사용된 재료의 신선도가 입안에서 완벽히 해독된다. 그래서 더 까다롭고, 더 잔인해졌다. "맛없는 것은 죄"라 여기는 왕 앞에서 지영의 접시는 늘 생과 사의 칼날 위에 놓인다. 처음엔 이헌 역시 "대체 어디서 굴러온 여자냐"며 경멸 어린 시선을 던지지만, 입 안을 가득 채우는 낯선 풍미 앞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표정이 풀어진다. 맛을 통해 먼저 마음이 열리는 폭군, 그 틈을 교묘하게 파고드는 셰프의 대결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단순 에피소드에서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몰리다

에피소드가 쌓여 갈수록, 단순한 수라간 에피소드에서 정치·외교 영역까지 서사가 확장된다. 명나라 사신이 공물 조건으로 요리 경합을 제안하고, 수라간은 순식간에 조선과 명의 체면이 걸린 전쟁터로 변모한다. 명의 숙수는 최신식 조리법과 화려한 플레이팅, 마치 베르사유 궁전의 만찬을 재현한 듯한 모습으로 조선을 압박하고, 이헌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지지 말라"는 한마디로 지영에게 짐을 얹는다. 고추장과 고춧가루가 사라진 상황에서 지영은 조선의 재료와 자신의 감각을 총동원해 그 시기를 뛰어넘는 요리를 창조해야 한다. 그 한 접시 위에는 자기 생존뿐 아니라, 궁과 나라의 자존심까지 얹어져 있다.

내부의 적도 만만치 않다. 권력을 노리는 제산대군, 수라간을 장악하려는 기득권 세력, 폐비 사건과 얽힌 궁중 음모가 뒤엉키며 이헌의 왕좌는 점점 위태로워진다. 지영은 어느새 단순한 '셰프'가 아니라, 왕의 곁을 지키는 동반자, 역사를 비껴가려 발버둥 치는 목격자가 된다. 폭군으로만 알았던 왕의 내면을 알게 되면서, 그를 한 사람의 남자로 바라보게 되는 자신의 마음도 함께 흔들린다. 한편 이헌도 처음에는 ‘혀를 즐겁게 해 주는 도구’였던 지영을 점차 동등한 파트너로 인식하게 된다. 누군가의 인생을 평가하던 혀가, 처음으로 자신이 평가받는 기분을 배우는 셈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서사는 한층 더 팽팽하게 조여든다. 연표상으로는 이미 큰 사화와 반정의 기운이 궁 안에 드리워져 있고, 이헌의 주변은 배신과 음모로 포위된다. 지영은 자신이 알고 있는 ‘역사책의 폭군’ 연산군과 눈앞의 이헌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이 남자를 살려야 하는지, 아니면 역사를 그대로 두어야 하는지. 그녀의 선택은 단지 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수백 년의 시간을 뒤흔드는 거대한 질문이 된다. 이 지점에서부터 드라마는 본격적인 타임슬립 판타지로 궤도를 수정한다. 망운록이라는 비밀스러운 책, 시간의 틈, 다시 열리는 문… 결말부에서 어떤 선택이 내려지고 어떤 재회가 이뤄지는지는, 직접 드라마를 보며 확인하는 쪽이 훨씬 좋다. 로맨틱 코미디의 달달함과 사극의 비극성이 미묘하게 교차하는 결말이라, 몇 줄 스포일러로는 그 풍미가 다 증발해 버린다.

익숙한 맛이 가장 새로운 맛?

'폭군의 셰프'는 얼핏 보면 익숙한 레시피다. 현대 직업인이 과거로 떨어지는 타임슬립, 조선 궁궐을 배경으로 한 로맨스, 폭군의 마음을 해동시키는 인물. 그런데 이 드라마는 이 익숙한 재료들을 "맛"이라는 매개로 정교하게 엮어낸다. 요리는 단순한 배경 설정이 아니라, 인물 간 관계 변화와 권력 구도를 동시에 드러내는 서사 장치다. 왕의 식탁은 곧 정치의 중심이고, 수라간에서 벌어지는 작은 갈등들은 그대로 조정의 권력 투쟁으로 번진다. 한 접시 음식이 누군가의 목숨을 살리고, 또 다른 누군가의 위신을 무너뜨린다. 그래서 매 회차 등장하는 요리 하나하나가 단순한 미식 포르노가 아니라 스토리의 핵심 이벤트로 작동한다.

연출은 음식과 사람, 공간을 모두 탁월하게 살려낸다. 클로즈업으로 포착한 장국의 표면, 하얗게 김이 피어오르는 밥과 붉은 양념의 대비, 기름에 튀겨지는 치킨의 소리까지 화면과 소리만으로도 침샘을 자극한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맛'의 묘사는 단지 생리적 반응에 머물지 않는다. 가난한 백성들에게는 한 번 먹기 힘든 기름진 음식, 사람을 처형하면서도 최고의 수라를 즐기는 왕의 모순, 궁녀와 환관들의 허기를 달래는 남은 수라의 사발까지 각 계층이 음식을 소비하는 방식이 사회 구조와 정확하게 맞물린다. 기름 한 방울도 귀하던 시대에, 기름을 펑펑 쏟아부어 만든 치킨은 그 자체로 권력의 상징이자 금기의 파괴다. 마치 마리 앙투아네트가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말한 것처럼, 지영의 치킨은 계급을 뛰어넘는 맛의 혁명이자 동시에 위험한 도발이다.

캐릭터 구축도 견고하다. 연지영은 단순히 '쾌활한 여주인공' 틀에 갇히지 않는다. 직업인으로서의 자존심과 생존 본능, 그리고 감정적 동요가 동시에 존재하는 입체적 인물이다. 요리할 때만큼은 레이저처럼 집중하지만, 정작 자신의 감정과 미래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불안정하다. 이헌 역시 교과서 속 폭군 이미지와 다르게 그려진다. 분명 폭력적이고, 변덕스럽고, 분노에 쉽게 휘둘리지만, 그 이면에는 끝없이 자기 자신을 검열하는 두려움이 있다. "모두가 나를 떠날 것"이라는 공포가 그를 더 잔인하게 만들고, 동시에 누군가의 진심을 갈구하게 만든다. 이 복합적인 면이 제대로 살아나면서, 시청자는 둘의 관계에 자연스럽게 이입하게 된다. 마치 '미녀와 야수'를 조선 궁궐로 옮겨놓되, 야수가 단순히 저주에 걸린 왕자가 아니라 역사적 트라우마를 짊어진 인물로 재해석된 느낌이다.

조연들도 각각 제 몫을 한다. 권모술수에 능한 제산대군, 궁중 암투의 중심에 군림하는 대왕대비는 사극에서 흔히 보던 '악역' 틀 안에만 갇히지 않는다. 각자의 신념과 욕망이 요리 경합과 정치 싸움 속에서 조금씩 드러나, 인물 관계도에 층위를 더한다. 수라간 식구들은 말 그대로 이 드라마의 '밑간'이다. 그들의 유머와 연대감, 서로를 구박하면서도 챙기는 관계가 없었다면, 왕과 셰프의 로맨스는 훨씬 건조하고 맥 빠졌을 것이다. 이들은 마치 주방 브리게이드처럼, 각자의 포지션에서 움직이며 하나의 완성된 요리 즉, 서사를 만들어낸다.

폭군의 셰프는 장르의 조합이 절묘하다. 사극·로맨스·코미디·판타지에 미식이라는 요소까지 얹었지만, 과하지 않게 요리를 중심축으로 잡아준다. 마치 완벽하게 균형 잡힌 소스처럼, 각 장르가 서로를 압도하지 않고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주연 배우의 이미지와 역할도 찰떡이다. 실제로도 광고와 예능에서 '먹방'과 밝은 에너지로 사랑받아온 배우가 셰프로 등장해, 익숙한 이미지를 새로운 서사 위에 자연스럽게 얹는다. ‘전형적인 폭군을 다시 쓰는 상상력’마저 주는 카타르시스다. 역사책에서 손가락질 받던 왕이 음식과 사랑을 통해 조금 다른 얼굴을 갖게 되는 과정은, 요즘 시청자들이 좋아하는 '재해석'의 쾌감을 정확히 건드린다. 마치 뮤지컬 '위키드'가 악한 마녀의 이야기를 다시 쓴 것처럼, '폭군의 셰프'는 연산군이라는 역사적 인물에게 새로운 서사적 생명을 불어넣는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후반부에 타임슬립과 반정, 망운록의 비밀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처음의 경쾌한 요리·로코 톤과 다소 이질적인 무게감이 생긴다. 어떤 시청자에게는 이것이 "이야기 볼륨이 갑자기 너무 커졌다"는 피로감으로 다가올 수 있다. 마치 가벼운 에피타이저를 즐기다가 갑자기 풀코스 디너가 쏟아지는 기분이랄까. 또 역사적 인물을 모티프로 삼은 만큼, 실제 역사와의 괴리에서 오는 불편함을 느끼는 시선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 작품이 처음부터 '가상 역사극'임을 분명히 했다는 점을 떠올리면, 결국 수용 여부는 각자의 감수성과 장르적 관대함의 문제에 가깝다.

조선과 셰프의 만남이 흥겹다면

타임슬립 로맨스는 좋아하지만 ‘맨날 비슷한 설정’에 질린 사람이라면 한 번쯤 볼 만하다. 여기서의 타임슬립은 단지 남녀 주인공의 운명을 이어주는 낭만적 장치가 아니라, 요리와 역사, 권력을 흔드는 본격적인 서사의 도구로 활용된다. 두 번째로, 요리 예능과 미식 콘텐츠를 즐겨 보는 시청자라면, '폭군의 셰프' 속 수라간을 일종의 사극 버전 키친 스튜디오로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각 회차마다 어떤 메뉴가 나올지 기다리는 재미가 쏠쏠하다.

마지막으로, ‘내가 가진 능력이 이 시대에서 쓸모 있나?’라는 고민을 해 본 사람에게 이 드라마를 건네고 싶다. 연지영은 누구보다 유능한 셰프인데도, 처음 조선에 떨어졌을 때는 그 능력이 하나도 통하지 않는 것처럼 느낀다. 하지만 도구와 환경이 달라졌을 뿐, 결국 사람을 움직이고 마음을 여는 것은 자신이 평생 갈고닦은 그 기술이라는 사실을 천천히 깨닫게 된다. 이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아마 이런 생각이 슬쩍 떠오를 것이다. "지금 내가 붙잡고 있는 이 일도, 언젠가는 전혀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상상과 위로가 필요한 밤이라면, '폭군의 셰프'는 생각보다 훨씬 따뜻하고 든든한 한 끼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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