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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고의 수사물 ‘영화 살인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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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 내내 빈틈 하나 없는 속이 꽉 찬 영화 40회 대종상 영화제 최우수작품상, 감독상 수상작

비가 끝도 없이 퍼붓는 논두렁 옆, 경찰과 마을 사람들이 뒤엉켜 있다.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은 바로 그 진흙탕에서 시작된다. '조디악'이나 '세븐' 같은 할리우드 연쇄살인 스릴러가 도시의 어둠 속에서 시작된다면, '살인의 추억'은 한국 시골의 대낮 햇살 아래, 그러나 씻을 수 없는 진흙으로 뒤덮인 곳에서 시작한다.

시골 형사 박두만(송강호)은 사건 현장이라고는 하지만, 아이들이 뛰놀고, 구경꾼이 들락거리는 장터 같은 분위기 속에서 첫 시체를 마주한다. 'CSI'나 '크리미널 마인드'의 과학수사팀이라면 기절초풍할 광경이다. 여성의 시신은 처참히 훼손된 채 논두렁에 버려져 있고, 형사들은 발자국이 찍힌 논바닥 위를 아무렇게나 밟고 다닌다. 과학수사는커녕 '감'과 '눈빛'과 '동네 소문'으로 범인을 잡겠다는 시골 형사의 자신감만 가득하다. 이 촌스러운 세계관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 바로 박두만이다.

박두만은 목격자에게 '프로파일러'의 최면 대신 눈을 '똑바로 뜨고 보라'며 소리를 지르고, 범인이라고 찍은 사람에게는 증거 대신 발차기와 폭력을 날린다. 그에게 수사는 '마인드헌터'의 논리적 프로파일링이 아니라 '버릇 없이 생긴 놈을 고르는 재능'에 가깝다. 마치 '핑크 팬더'의 클루조 경감이 실제 살인사건을 맡은 것 같은 코미디와 비극의 기묘한 혼합.

그 곁에는 더욱 원초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동료 형사 조용구(김뢰하)가 있다. 고문에 가까운 폭행, 허위 자백을 강요하는 취조는 이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수단이다. '본 시리즈'의 CIA 고문 장면이 영화적 과장이라면, '살인의 추억'의 경찰 폭력은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오히려 더 불편하다. 그런데도 그들은 스스로를 '정의의 편'이라 믿는다. 작은 농촌 마을에 연쇄살인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 믿음이 크게 흔들릴 일이 없었다.

하지만 비 오는 날, 여성만 골라 잔혹하게 살해하는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분위기가 변한다. 라디오에서 특정 곡이 흘러나오는 밤, 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사라지고,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시신이 발견된다. '조디악'의 암호 편지처럼, 이 패턴은 범인의 시그니처다. 사건은 점점 구조를 드러내고, 마을은 '살렘의 마녀재판'처럼 공포에 잠긴다.

상부에서는 압박이 쏟아지고, 언론은 무능한 경찰을 '엠파이어' 지가 영화를 평가하듯 비웃으며 사건을 크게 다룬다. 이런 와중에 서울에서 파견된 서태윤(김상경)이 등장한다. 그의 수사 방식은 박두만과 '셜록 홈즈'와 왓슨만큼이나 정반대다. 현장을 테이프로 봉쇄하고, 가설과 논리, 자료 분석을 강조한다. 서울식 '합리성'과 지방의 '감 수사'가 한 지붕 아래 들어오면서, 수사팀 내부의 긴장감도 서서히 높아진다.

두만과 태윤은 처음엔 서로를 철저히 불신한다. 두만에게 태윤은 "똑똑한 척만 하는" '빅뱅이론'의 셸든 같은 도시 형사이고, 태윤에게 두만은 "증거도 없이 사람을 때리는" '워킹 데드'의 좀비 진압대원 같은 촌 형사일 뿐이다. 하지만 연쇄살인은 두 사람의 자존심을 가릴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시신은 계속 발견되고, 유력해 보이던 용의자들은 번번이 알리바이가 생기거나, '레인맨'의 레이먼드처럼 멘탈이 붕괴된 지적장애인만 남는 식으로 사건은 미끄러져 나간다. 그 과정에서 경찰의 폭력성과 무능, 당시 시대 분위기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가로등조차 충분치 않은 깜깜한 도로, 공장 사이를 가르는 철길, 여자를 집까지 바래다주는 문화가 생존 전략이 되어버린 밤길들이 화면을 채운다. '택시 드라이버'의 뉴욕이 범죄의 도시였다면, '살인의 추억'의 화성은 안전이 사라진 시골이다.

연쇄살인이 계속되면서, 경찰 내부의 초조함도 폭발 직전으로 치닫는다. 두만은 자신이 가진 유일한 무기, '얼굴만 봐도 알 수 있다'는 직감을 점점 더 집착적으로 믿으려 하고, 태윤은 냉정함을 유지하려 애쓰지만 계속 어긋나는 수사와 모순된 증거 앞에서 균열을 드러낸다. 마치 영화 속 모든 인물이 '인터스텔라'의 블랙홀 같은 거대한 안개 속에서 허우적대는 것 같다.

관객은 누군가가 범인인 것 같다가도, 다음 장면에서 무너지는 알리바이를 보며 다시 혼란에 빠진다. '유주얼 서스펙츠'의 카이저 소제처럼 명확한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프리즈너스'처럼 도덕적 딜레마를 극한으로 밀어붙이는 것도 아니다. 수사는 자꾸만 빙빙 도는 듯한데, 그 원 안에는 언제나 처참하게 버려진 피해자들의 시신이 있다.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박두만과 서태윤이라는 두 형사의 내면 변화에 집중한다. 처음엔 서로를 비웃던 이들이, 점점 "정말 이 놈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집념 아래 한 방향으로 내달린다. '다크 나이트'의 배트맨이 조커를 쫓듯, 이들도 보이지 않는 범인을 쫓는다. 물증은 부족하고, 과학수사는 시대의 한계에 가로막히며, 그 공백은 두 사람의 감정과 폭력으로 채워진다.

이들이 마침내 '한 놈'을 마주 보는 장면들에서, 영화는 쌓아 올린 모든 긴장을 한 번에 끌어올린다. 그러나 '살인의 추억'은 '더티 해리'의 통쾌한 해결이나 '양들의 침묵'의 완벽한 정의 구현을 약속하지 않는다. 결말과 마지막 시선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결국 관객이 극장을 나와 곱씹어야 할 문제로 남겨둔다. 그 마지막 눈빛은 '블레이드 러너'의 로이 배티가 죽기 전 보여준 눈빛만큼이나 오래 각인된다.

실화 바탕에 ‘봉테일’을 넣어 음식을 완성하다

'살인의 추억'의 작품성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그 너머의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인 데 있다. 1980년대 후반, 실제로 존재했던 화성 연쇄살인 사건이라는 묵직한 소재를, 봉준호 감독은 '조디악'의 데이비드 핀처처럼 단순 재현이나 자극적 스릴러가 아니라 '시대극이자 인간극'으로 번역해낸다.

영화 속 공간인 화성 농촌은 그 자체로 한국 현대사의 뒷골목 같은 이미지다. 군사정권 말기, 아직 민주화의 바람이 완전히 스며들지 못한 경찰 조직, 인권 개념이 미비한 수사 관행, 성폭력과 여성 안전 문제에 둔감했던 사회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스며 있다. '매드 맨'이 1960년대 미국의 성차별을 담았다면, '살인의 추억'은 1980년대 한국의 여성 안전 불감증을 담는다. 영화는 이런 요소들을 직접 비판하는 대신, 그 시대의 공기를 정면으로 보여줌으로써 관객에게 판단을 맡긴다.

연출의 힘은 디테일에서 빛난다. 비 내리는 논두렁, 공장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수학여행을 떠나는 초등학생들 사이로 스며드는 불안감 같은 장면들은, 단순 배경이 아니라 감정의 톤을 조절하는 장치다. 사건이 발생하는 밤마다 비가 내리는 설정은 장르적으로는 '블레이드 러너'의 영구적 빗줄기처럼 상징적이고, 현실적으로는 증거를 씻어내는 요소로 기능한다.

형사들이 현장을 수색하는 장면은 곧 '이미 지워지고 있는 진실'을 쫓는 허무한 몸부림으로 보인다. '시지프스'가 바위를 밀어 올리듯, 형사들은 사라져가는 증거를 쫓는다. 이 시공간은 지금의 관객에게 '옛날 이야기'로만 남지 않는다. 어딘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한국 사회의 그림자를 떠올리게 만든다. '기생충'이 현재의 계급 문제를 다뤘다면, '살인의 추억'은 과거의 시스템 문제를 다룬다. 그리고 그 과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배우들의 연기는 '대니얼 데이 루이스'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송강호가 연기한 박두만은 처음에는 '핑크 팬더'의 클루조 경감처럼 무능하고 허술한 촌 형사로 웃음을 유발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무능이 낳는 비극의 무게를 온몸으로 버텨낸다. 그의 눈빛은 영화 초반과 후반이 완전히 다르다.

초반의 느긋한 눈이 후반에는 공포와 자책, 분노와 허탈함이 뒤섞인 심연으로 바뀐다. '택시 드라이버'의 트래비스 비클이 점점 광기로 빠져들듯, 박두만도 집착의 늪으로 빠져든다. 김상경이 연기한 서태윤은 서울식 '냉철함'의 표본처럼 등장하지만, 결국 사건에 집어삼켜지는 인물이다. '셜록'의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감정을 차단한 채 사건을 바라본다면, 김상경의 서태윤은 감정을 억누르다 결국 폭발한다.

감정을 억누르던 얼굴이 어느 순간 감당할 수 없는 분노로 터져 나올 때, 관객은 이 영화가 단순한 수사극이 아니라는 걸 체감한다. 조연들의 존재감도 강렬하다. 조용구 형사의 폭력성과 나름의 충성심, 의심스러운 용의자들의 불안한 표정들은 영화 전체를 통해 '이 시대의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이 작품이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는, 장르적 재미와 미제 사건의 서늘함 사이에서 균형을 탁월하게 잡았기 때문이다. 웃음을 유발하는 슬랩스틱한 장면, 시골 경찰서의 '브루클린 나인나인' 같은 코미디 풍경, 촌스러운 대사들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어 관객이 숨을 돌릴 틈을 준다.

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가지 않는다. 곧이어 등장하는 시신과 피해자들의 사연, 그리고 계속 틀어지는 수사는 관객의 웃음을 죄책감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 리듬이 '살인의 추억' 특유의 정조를 만든다. 웃다가도 금방 목이 타들어 가는 듯한 묘한 감정. '조조 래빗'이 코미디와 비극을 섞었다면, '살인의 추억'은 슬랩스틱과 공포를 섞는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영화가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범인이 누구인지, 경찰의 선택이 옳았는지, 이 사건이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에 대한 단호한 해답을 주지 않는다. '인셉션'의 팽이처럼, 마지막 장면은 관객에게 질문을 남긴다. 대신 관객 각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정말 저 시대와 다를까?", "지금의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누군가의 비극을 방치하고 있지는 않은가?" 같은 질문들이다. 이런 여지가 영화를 '시민 케인'처럼 반복 관람해도 질리지 않게 만든다. 시간과 관객의 나이에 따라, 집중하게 되는 장면과 감정이 달라진다.

소름 끼치지만, 다소 씁쓸한

만약 '조디악', '세븐', '양들의 침묵' 같은 잘 만든 수사 스릴러를 찾고 있는 관객이라면 '살인의 추억'은 거의 필수 관람 목록에 가깝다. 단순히 '범인이 누굴까'를 추리하는 재미를 넘어서, 수사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간 군상과 시대의 공기를 함께 맛보게 된다. 퍼즐 맞추기보다, 퍼즐 조각 사이의 틈을 바라보는 과정이 더 흥미로울 것이다.

또, 한국 사회의 지난 시간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돌아보고 싶은 사람에게도 이 영화는 강력하게 추천할 만하다. 역사 교과서나 '그것이 알고 싶다' 같은 다큐멘터리로 접하는 80년대 후반이 아니라, 시골 경찰서와 논두렁, 공장과 골목길로 구현된 '생활사'의 기억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지금도 반복되는 구조적 문제들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경찰·사법 시스템, 여성 안전, 언론 보도 방식까지, 영화가 건드리는 문제의식은 생각보다 넓고 깊다.

마지막으로, '레슬러'나 '위플래쉬'처럼 인간의 무력함과 집착, 그리고 그 속에서 어떻게든 의미를 찾으려는 몸부림에 관심이 있는 관객이라면 '살인의 추억'이 오래 남을 것이다. 이 영화를 본 뒤에는, 박두만이 마지막에 던지는 한마디와 그 눈빛이 머릿속을 좀처럼 떠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 시선은 미제 사건의 범인을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스크린 밖 우리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그때 우리는 무엇을 했고,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이 영화는 예의 없이, 그러나 집요하게 되묻는다. 그런 질문 앞에 한 번쯤 정면으로 서 보고 싶은 사람에게, '살인의 추억'은 여전히 유효한,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소환될 작품이다. 2019년 실제 범인이 검거되었지만, 영화가 던진 질문들은 여전히 답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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