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AVE=최재혁 기자] 퇴근길, 종이 가루가 흩날리는 제지 공장 앞. 한때 라인 전체를 책임지던 공정 관리자 유만수(이병헌)는 오늘도 퇴근벨이 울리기 무섭게 대리석 현관을 나와, 반듯한 마당과 분재가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25년 동안 한 길만 파 온 덕에 안정된 연봉, 대출 다 갚아가는 내 집, 미리(손예진)와 두 자녀, 마당을 뛰어다니는 개 두 마리까지. 스스로도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삶이다. 마치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모든 목표를 달성한 것처럼. 그런데 이 완벽해 보이던 풍경이, 어느 날 인사팀의 서늘한 한마디와 함께 허물어진다. 구조조정 대상자 명단 맨 위에, 만수의 이름이 찍혀 있는 것이다. 세이브 파일 자체가 날아가 버린 것.
처음에는 큰일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 같은 경력자를 안 데려가겠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재취업 박람회와 컨설팅을 부지런히 다닌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이력서에는 25년 경력이 줄줄이 적혀 있지만, HR 담당자들은 "조직이 유연해야 한다", "MZ와의 소통이 중요하다"는 말만 반복한다. 마치 빈티지 음반 수집가가 스트리밍 시대의 음악 서비스 면접을 보는 것처럼. 그룹 면접장에서는 젊은 지원자들이 유창한 영어로 프레젠테이션을 펼치는 사이, 만수는 PPT 리모컨 잡는 법부터 버벅거린다. 자존심이 서서히 갈가리 찢겨 나가는 지점이다. 마치 종이를 한 장 한 장 찢듯, 제지 공장 직원답게.
그러던 중, 한 제지 회사에서 딱 하나의 공장 관리자 자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직이 아니라 '인생 리셋'이 걸린 단 한 자리. 오징어 게임의 456억이 아니라, 한 달 연봉 500만 원짜리 일자리를 두고 벌이는 배틀로얄. 만수는 구인 공고를 파고들다, 자신과 경쟁하게 될 동종 업계 베테랑들의 존재를 확인한다. 평생 종이만 만지며 살아온 구범모(이성민), 라인에서 기계를 다루다 지금은 구두 매장 매니저로 일하는 고시조(차승원), 여전히 현장과 인맥을 쥐고 있는 현장형 관리자 최선출(박희순)까지.
동병상련이 증오로 변하는 순간
이들을 하나둘 만나 보면서 만수는 이상한 감정에 휩싸인다. 다들 자기처럼 잘려 나간 중년 남자들이고, 각자의 방식으로 버티고 있을 뿐이다. 낡은 타자기로 이력서를 치는 범모, 배나무가 시들어가는 마당을 보며 술에 기대 사는 그의 집은 미래의 자신의 모습처럼 보인다. 마치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스크루지가 유령들에게 미래를 보여 받듯. 깔끔한 정장 차림으로 손님을 맞는 시조의 구두 가게에는, 제지 공장 시절의 자존심과 씁쓸함이 동시에 배어 있다. 공장에서 종이를 다루던 손이 이제 가죽을 만지고 있다는 아이러니. 선출이 들려주는 현장의 뒷이야기 속에는, 한때 만수가 믿었던 '회사 가족주의'의 폭력성이 뒤늦게 드러난다. 가족은 원래 버리고 싶을 때 버릴 수 있는 게 아닌데.

바로 이 지점에서, 만수의 고민은 뒤틀린다. "어차피 한 자리뿐인데, 누군가는 떨어질 수밖에 없잖아. 그게 내가 아니면 되는 거고… 어쩔 수가 없다." 처음에는 푸념처럼, 나중에는 주문처럼 이 말을 되뇌기 시작한다. 마치 해리포터의 호크룩스처럼, 이 말을 반복할 때마다 그의 영혼은 조금씩 갈라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는 무모한 계획을 세운다. '경쟁자들'의 삶에서 아주 작은 균열을 만들어, 그들이 면접에 나올 수 없게 만들겠다는 것. 사고처럼 보이는 불상사, 우연을 가장한 방해, 그 선을 살짝씩 넘나드는 시도가 이어지면서, 영화는 본격적인 블랙 코미디 스릴러의 톤으로 진입한다. 평범한 중년이 범죄자가 되는 과정을 마치 요리 레시피처럼 단계별로 보여주는.
세상에서 가장 서툰 범죄자
만수의 행동은 생각보다 서툴고 우스꽝스럽다. 범모의 집을 염탐하다 피크닉 장면을 훔쳐보며 감정이 흔들리고, 시조의 가게에 손님인 척 찾아갔다가 실직자끼리의 공감에 덩달아 취한다. 마치 첩보 영화의 제임스 본드가 아니라, 007 패러디 영화의 미스터 빈처럼. 입으로는 '저 사람들만 없으면 우리 가족은 다시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합리화하지만, 눈빛은 점점 더 공허해진다. 한편, 만수의 변화를 가장 먼저 눈치채는 사람은 아내 미리다. 그는 "꼭 제지업이어야 하냐, 다른 길도 보자"라고 설득하고, 아이들을 챙기며 실질적인 생계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만수는 "나는 종이밖에 모른다"며 고개를 젓는다. 마치 CD 제조업자가 스트리밍 시대에도 "나는 CD밖에 모른다"고 고집하는 것처럼. 이 부부의 대화는, 한 집 안에서 경제 현실을 바라보는 두 시선의 다툼이자, 이 영화의 핵심 질문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장면들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만수 곁에는 이해와 위로보다, 두려움과 비밀이 쌓여 간다. 작은 '조정'으로 시작한 행동이 점점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번지고, 만수는 자신이 초래한 사건들 앞에서조차 "어쩔 수가 없었다"고 되뇌며 스스로를 속인다. 영화는 그가 벌인 '전쟁'이 어디까지 치닫는지,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는지 끝까지 따라가지만, 결말의 구체적인 선택과 결과는 직접 확인하는 편이 좋겠다. 마지막 챕터에서 제목이 어떻게 다시 울리는지, 그 울림이 얼마나 불편한지까지 포함해, 이 작품의 힘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마치 부메랑이 돌아오듯,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이 결국 누구를 향하는지 깨닫는 순간의 전율.
박찬욱이 발견한 새로운 폭력 ‘해고통지서’
'어쩔 수가 없다'는 박찬욱이라는 감독의 이름값을 믿고 보기에도, 동시에 그가 기존에 보여준 폭력·복수 미학과는 조금 다른 궤도에 서 있다. 이 영화의 폭력은 피 튀기고 장기를 클로즈업하는 방식이 아니라, 구조조정 통보서 한 장, HR 담당자의 빈말, 집에 날아든 연체 고지서처럼 평범한 사물에 깃든다. 마치 올드보이의 망치가 아니라, 회사 로고가 박힌 백색 봉투가 흉기가 되는 것처럼. 직장이라는 시스템이 어떻게 한 사람을 서서히 벼랑 끝으로 밀어붙이는지, 그 압력을 차갑게 포착한 뒤, 만수의 비틀린 선택에 블랙 코미디적 톤을 덧입힌다.
원작 소설 '더 액스'가 미국식 산업 구조조정을 배경으로 했다면, 영화는 이를 한국의 제지 공장과 중년 가장들의 현실로 완전히 옮겨 심는다. IMF 이후 반복되어 온 정리해고, 정규직에서 밀려난 뒤 다시는 제자리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세대의 감각이 화면 구석구석에 배어 있다. 한때 "회사와 함께 늙겠다"고 다짐했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비용'으로 취급될 때, 그들이 붙잡을 수 있는 마지막 자존심이 얼마나 위험한 방향으로 요동치는지 보여준다. 제목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은 여기서 그냥 핑계가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너무 자주 듣던 체념의 문장을 비틀어 전시하는 장치가 된다. 마치 갤러리에 전시된 변기처럼, 일상의 언어를 예술로 승격시키는.
이 영화의 핵심은 유만수라는 캐릭터에 있다. 이병헌은 만수를 악인도, 순수한 피해자도 아닌, 구조와 욕망 사이에서 점점 이성을 잃어가는 '평범한 괴물'로 만든다. 해고 통보를 듣고도 상사의 눈치를 보며 "혹시 실수 아니냐"고 조심스럽게 묻는 눈빛, 면접장에서 자신보다 어린 면접관에게 굽실거리다 뒤돌아서 혼자 중얼거리는 모멸감, 경쟁자들을 몰래 염탐하며 미묘한 동질감을 느끼는 순간까지. 이병헌 특유의 미세한 표정 변화와 호흡이, 만수의 추락 과정을 설득력 있게 끌고 간다. 마치 3D 프린터로 인간의 붕괴 과정을 층층이 쌓아올리듯. 관객은 그를 비난하면서도, 어딘가에서 은근히 자기 모습이 겹쳐 보이는 감정을 피하기 어렵다. 이게 바로 이 영화가 무서운 이유다. 만수는 우리가 아니지만, 동시에 우리일 수도 있다.
미리 역의 손예진은 이 비극적 블랙 코미디 속에서 가장 현실적인 감각을 가진 인물이다. 남편보다 먼저 상황을 파악하고, 다른 가능성을 제안하며,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감정을 눌러 두는 얼굴. 흔히 이런 장르에서 아내 캐릭터는 남편의 그늘에 가려지기 쉬운데, 이 영화의 미리는 정반대다. 마치 타이타닉호가 가라앉을 때 구명보트 탈출 계획을 세우는 것처럼 냉정하고 실용적이다. 만수와 범모, 두 집안의 부부가 교차 편집될 때, 관객은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남편들보다, 냉정하게 현재를 직시하는 아내들의 목소리에 훨씬 설득당하게 된다. 아라(염혜란)의 존재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네 명의 중년, 하나의 운명
구범모(이성민), 고시조(차승원), 최선출(박희순) 세 사람은 각각 만수의 다른 얼굴처럼 설계돼 있다. 회사와 과거의 영광에 붙잡힌 범모, 해고 이후 다른 업종으로 갈아타며 어떻게든 버티려는 시조, 여전히 조직 안에서 살아남은 선출은, 만수가 "나도 저렇게 될지 모른다"고 두려워하는 미래들이다. 마치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과거·현재·미래의 유령처럼. 이들이 하나씩 만수의 레이더에 포착되고, 다시 그가 이들을 향해 움직일 때마다, 관객은 범죄 스릴러의 긴장감과 동시에 어떤 씁쓸한 자기 고백을 듣는 느낌을 받는다. 이건 살인 미스터리가 아니라 자화상 그리기다.
연출적으로는 박찬욱표 미장센과 구성력은 여전하다. 공장 내부의 톤 다운된 회색, 만수의 집 마당에 놓인 과하게 다듬어진 분재(통제에 대한 집착의 상징), 범모 집의 병든 배나무(시들어가는 꿈의 메타포)처럼, 인물의 내면을 상징하는 오브젝트들이 과장되지 않은 선에서 배치된다. 카메라는 피와 시체보다, 그것을 둘러싼 풍경과 사후의 정적에 더 오래 머무른다. 덕분에 관객이 느끼는 공포는 '이 사람 다음은 혹시 나일지도 모른다'는 사회적 불안에 가까워진다. 좀비 영화의 공포가 아니라 경제 뉴스의 공포.

해외 영화제와 비평계의 반응도 뜨겁다. 영화는 2025년 베네치아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어 긴 기립박수를 받았고, 이어 토론토, 런던, 스톡홀름 등 주요 영화제를 돌며 상과 상영 요청을 휩쓸었다. 한국에서는 비평가협회상과 청룡영화상에서 작품·연기 부문 수상을 이어가며, 상업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인정받았다. 여러 해외 매체가 현대 노동 환경을 향한 가장 날카로운 풍자라고 평가했다. 한국의 구조조정이 이탈리아 관객에게도, 캐나다 관객에게도, 스웨덴 관객에게도 통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신자유주의라는 공통의 악몽 아래에서, 우리는 모두 만수가 될 수 있다는 것.
당신의 미래가 되지 않기 바라지만, 찾아올 미래
회사라는 조직에서 한 번이라도 구조조정 소문에 잠 못 이뤄 본 직장인이라면,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을 남발하는 사람들을 보며 불편한 웃음을 짓게 될 것이다. 만수의 엉성한 범죄 계획에 "저렇게까지 할 리가"라며 선을 긋다가도, 어느 순간 그의 합리화 논리를 따라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 순간 이 영화는 단순 스릴러가 아니라, 보는 사람의 양심을 시험하는 거울이 된다. 마치 블랙 미러의 에피소드처럼, 편하게 보다가 갑자기 자기 얼굴이 화면에 비치는 충격.
박찬욱 감독의 작품을 좋아하지만, 기존의 과격한 폭력 미학에 조금 부담을 느꼈던 관객에게도 잘 맞는다. '어쩔 수가 없다'는 잔혹한 상황을 다루지만, 그 표현 방식은 훨씬 현실적이고 말맛과 상황 코미디에 기대는 쪽에 가깝다. 올드보이의 산낙지 대신 구내식당의 C코스 정식이 나오는 박찬욱 영화. 동시에, 그가 어떻게 장르의 틀을 빌려 사회 구조와 인간 심리를 해부하는지 지켜보는 재미가 크다. 이전 영화들과 비교하며 감독의 변주를 읽어내는 즐거움도 있을 것이다. 마치 재즈 뮤지션이 스탠다드 넘버를 자기 방식으로 재해석하는 것처럼.
요즘 한국 사회가 왜 이렇게 팍팍하게 느껴지는지, 극장에서 한 번 제대로 체감해 보고 싶은 사람에게 이 영화를 권하고 싶다. '어쩔 수가 없다'는 말 뒤에 숨은 진짜 감정이 무엇인지, 우리는 언제부터 그 말을 입에 달고 살게 되었는지, 영화는 정답 대신 아주 불편한 질문을 남긴다. 극장을 나서는 길, 만수 대신 자기 입에서 그 말을 중얼거리다 멈칫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그 멈칫함이야말로, 이 영화가 남기는 가장 중요한 여운이다.
우리는 정말 어쩔 수가 없었을까? 아니면 그저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걸까? 이 영화는 그 질문 앞에 관객을 홀로 세워둔다. 마치 거울 앞에 선 것처럼, 도망칠 수도 없고 외면할 수도 없는 자리에. 그리고 그게 바로 훌륭한 영화가 하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