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이병헌 재회 ‘어쩔 수가 없다’, 평범한 가장의 섬뜩한 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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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혁
By 최재혁 기자

“내 자리 뺏으면 죽인다” 재취업 전쟁이 부른 비극… 토론토영화제 관객상 화제작

[Magazine Kave=최재혁 기자] 제지 공장 앞, 종이 가루가 흩날리는 퇴근길. 공정 관리자 유만수(이병헌)는 25년 근속의 안정된 삶을 영위해왔다. 대출금을 거의 상환한 자가 주택, 아내 미리(손예진)와 두 자녀, 그리고 반려견까지. 스스로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자부하던 그의 세계는 인사팀의 구조조정 통보와 함께 순식간에 붕괴한다. 완벽해 보이던 삶의 기반이 송두리째 사라진 것이다.

영화
영화 '어쩔 수가 없다' 스틸컷

실직 초기, 만수는 자신의 경력을 믿고 낙관한다. 그러나 재취업 시장의 현실은 냉혹했다. 화려한 25년 경력은 HR 담당자들에게 ‘유연하지 못한 과거의 유산’으로 치부될 뿐이다. 그룹 면접장에서 젊은 지원자들이 유창한 외국어 실력을 뽐낼 때, 프레젠테이션 리모컨 조작조차 서툰 만수는 처참하게 무너진다. 제지 공장 직원으로서의 자부심이 찢겨 나가는 순간이다.

그러던 중, 한 제지 회사에서 단 하나의 공장 관리자 자리를 모집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는 단순한 이직이 아닌 ‘인생 리셋’을 위한 마지막 기회다. 만수는 구인 공고를 분석하며 자신과 경쟁하게 될 동종 업계 베테랑들을 파악한다. 평생 종이만 다뤄온 구범모(이성민), 현재 구두 매장 매니저로 일하는 고시조(차승원), 여전히 현장 영향력을 쥐고 있는 최선출(박희순)이 그들이다.

동병상련이 살의로 변질되다

경쟁자들을 관찰하며 만수는 기묘한 감정에 휩싸인다. 그들 역시 자신처럼 사회에서 밀려난 중년 가장들이기 때문이다. 낡은 타자기로 이력서를 작성하는 범모와 미래의 불안을 안고 사는 그의 가정은 만수의 미래와 겹쳐 보인다. 시조의 구두 가게에는 과거의 자존심과 현재의 비루함이 공존하며, 선출의 이야기에서는 ‘회사 가족주의’의 허상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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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어쩔 수가 없다' 스틸컷

바로 이 지점에서 만수의 고뇌는 뒤틀린 결론에 도달한다. "어차피 한 자리뿐이라면, 내가 아니면 안 된다. 어쩔 수가 없다." 처음에는 푸념이었던 이 말은 점차 자기최면이 되어 그의 도덕성을 마비시킨다. 만수는 경쟁자들이 면접에 참여할 수 없도록 치명적인 방해 공작을 계획한다. 우연을 가장한 사고, 선을 넘나드는 위협이 이어지며 영화는 본격적인 블랙 코미디 스릴러로 전환된다.

세상에서 가장 서툰 범죄자의 탄생

만수의 범죄 행각은 치밀하기보다 우스꽝스럽고 서툴다. 범모의 집을 염탐하다가도 그들의 단란함에 마음이 흔들리고, 시조와는 실직자의 비애를 공유하며 공감하기도 한다. 입으로는 가족의 행복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하지만, 그의 눈빛은 점차 공허해진다. 아내 미리는 이러한 남편의 변화를 가장 먼저 감지한다. 현실적인 생계 대책을 강구하는 미리에게 만수는 "나는 종이밖에 모른다"며 고집을 꺾지 않는다. 이들 부부의 갈등은 영화가 던지는 경제적 현실에 대한 질문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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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어쩔 수가 없다' 스틸컷

시간이 흐를수록 만수의 주변에는 이해와 위로 대신 공포와 비밀이 쌓인다. 작은 조정으로 시작된 일은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고, 만수는 여전히 "어쩔 수가 없었다"는 말을 반복한다. 영화는 그가 벌인 전쟁의 끝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결말에 이르러 제목이 주는 중의적인 의미와 그 불편한 울림을 확인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박찬욱이 포착한 새로운 폭력, ‘해고통지서’

박찬욱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물리적 신체 훼손이 아닌, 시스템이 가하는 폭력을 조명한다. 구조조정 통보서, HR 담당자의 형식적인 위로, 연체 고지서 등 일상의 사물들이 흉기보다 더 날카롭게 주인공을 벼랑 끝으로 내몬다. 직장이라는 시스템이 개인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냉철하게 포착한 뒤, 그 위에 블랙 코미디의 색채를 입혔다.

원작 소설 ‘더 액스’가 미국의 산업 구조조정을 다뤘다면, 영화는 이를 한국적 현실로 완벽하게 이식했다. IMF 이후 고착화된 고용 불안과 중년 세대의 위기감이 스크린 곳곳에 배어 있다. 제목 ‘어쩔 수가 없다’는 한국 사회에서 체념과 회피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언어를 비틀어 전시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병헌은 유만수 역을 통해 악인과 피해자의 경계를 허무는 ‘평범한 괴물’을 완성했다. 모멸감과 생존 본능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그의 미세한 표정 연기는 관객으로 하여금 비난과 연민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손예진이 연기한 미리는 감상에 젖지 않고 냉철하게 현실을 직시하는 인물로, 극의 중심을 잡으며 설득력을 더한다.

네 명의 중년, 하나의 비극적 운명

구범모(이성민), 고시조(차승원), 최선출(박희순)은 만수의 또 다른 자아이자 두려운 미래다. 만수가 이들을 제거하려 할 때마다 관객은 단순한 스릴러의 긴장감을 넘어 씁쓸한 자기 고백을 마주하게 된다. 박찬욱 감독 특유의 미장센은 여전하다. 통제 강박을 상징하는 분재와 시들어가는 배나무 등 상징적인 오브제들이 인물의 내면을 효과적으로 시각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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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어쩔 수가 없다' 스틸컷

영화는 2025년 베네치아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 및 토론토국제영화제 관객상 수상 등 해외에서 먼저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현대 노동 환경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가 전 세계적인 공감대를 형성했음을 방증한다.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시스템 아래, 우리 모두가 잠재적인 ‘만수’가 될 수 있다는 서늘한 경고다.

당신의 미래가 될 수도 있는 이야기

‘어쩔 수가 없다’는 구조조정의 공포를 경험한 직장인들에게 불편한 거울과도 같은 작품이다. 만수의 엉성한 범죄를 비웃다가도, 어느새 그의 논리에 동화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박찬욱 감독은 기존의 파격적인 스타일을 덜어내고, 말맛과 상황적 아이러니를 통해 사회 구조와 인간 심리를 해부했다.

팍팍한 한국 사회의 단면을 스크린으로 확인하고 싶은 관객에게 이 영화를 추천한다. 영화는 정답 대신 "우리는 정말 어쩔 수가 없었는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남긴다. 극장을 나서는 길, 관객은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거장 박찬욱이 선사하는 영화적 체험의 본질이다.

영화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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