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묘 영화/땅 밑에서 터져 나온 1,000만 명의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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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오컬트 장르의 아버지 ‘장재현’의 작품 45회 청룡영화상 감독상 수상작

[magazine kave]=최재혁 기자

산속 깊은 곳, 안개가 낮게 깔린 묘역을 향해 검은 승합차 한 대가 천천히 올라간다. 마치 장의차가 아니라 유령 사냥꾼들의 작업 차량처럼. 땅의 기운을 읽는 풍수사 김상덕(최민식), 냉철하고 장사 감각 확실한 장의사 고영근(유해진), 젊고 당찬 무당 이화림(김고은), 그리고 화림의 제자이자 법사 윤봉길(이도현). 네 사람은 미국 LA에서 날아온 거액 의뢰 한 건 때문에 이 자리에 모였다. 잘나가는 부동산 부자 집안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묫바람'이 대물림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태어나자마자 밤낮없이 울어대는 아기, 원인불명으로 쓰러져 병원에 누운 아버지, 그전에 이미 삶을 포기해버린 큰아들까지. 의뢰인 박지용(김재철)은 이 모든 불행이 조상 묘자리 때문이라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정리해 달라고 부탁한다.

영화는 LA 병원에서의 첫 장면부터 기묘한 공기를 만든다. 형광등 불빛 아래, 믿기 힘들 만큼 고요한 병실. 화림은 아기에게 다가가 휘파람을 불고, 경문을 읊으며 아이의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그 짧은 응시 끝에 그녀가 내리는 결론은 간단하다. "조상이 묫자리가 마음에 안 들어서 지랄을 하는 거"라는 것. 이렇게 투박한 입담과 오컬트적 감각이 한꺼번에 튀어나오는 순간, 관객은 이미 장재현 감독 특유의 세계로 끌려 들어간다. 마치 에어컨 빵빵한 LA 병원에서 갑자기 산골 무당 집으로 워프하는 것처럼.

땅을 파는 순간, 역사가 숨 쉬기 시작한다

한국으로 돌아온 화림과 봉길은 상덕, 영근과 함께 본격적인 '파묘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상덕은 흙을 씹어 보고, 바람을 느끼고, 나무의 결을 보며 묘의 자리를 살핀다. 마치 와인 소믈리에가 떼루아를 읽듯. 한겨울에도 푸르게 서 있는 나무, 주변만 이상하리만큼 축축한 땅, 지나치게 깊이 파인 봉분. 상덕의 눈에는 이 묘가 처음부터 '사람을 살리라고 만든 자리'가 아니라, 뭔가를 가둬 두려는 의도로 조성된 자리처럼 보인다. 화림 역시 "여긴 건드리는 순간 일이 커진다"는 불길한 감각을 느끼지만, 이미 거액의 계약금이 오간 상황에서 모두 물러설 수 없다. 프리랜서의 숙명이랄까.

삽이 들어가고, 봉분이 허물어지는 순간부터 영화의 공포는 체온을 얻는다. 관 속에서 흘러나오는 기묘한 물, 인간의 것이 아닌 듯한 머리카락, 철조망으로 감싸진 거대한 나무관. 상덕과 일행은 단순한 조상 묘가 아니라,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봉인해 둔 무언가'를 건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는다. 이 첫 번째 파묘 장면은 흙먼지와 땀, 숨소리를 활용해 관객의 피부로 느껴지게 만드는 시퀀스다. ASMR의 정반대편에 있는, 소리만으로도 소름 돋는 경험.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다음이다. 묘를 파낸 뒤에도 박지용 집안의 악운은 멈추지 않고, 일행 주변에서 동티가 난 듯한 사건들이 잇달아 터진다. 집안 사람들의 기이한 죽음, 일을 도왔던 인부의 의문사, 설명할 수 없는 징조들. 상덕과 화림은 "아예 다른 것"이 움직이고 있다는 걸 감지하고, 추가 조사를 통해 한반도 허리에 해당하는 백두대간 한가운데 박힌 '일종의 쇠말뚝' 같은 존재를 추적하게 된다. 마치 미스터리 게임에서 하나의 퀘스트를 클리어했더니 히든 보스가 등장하는 것처럼.

이들이 도착하는 곳은 작은 사찰 보국사와 그 인근 산골 마을. 겉보기에는 평온한 시골이지만, 창고 한편에 숨겨진 비밀의 관과 오래된 고지도, 독립운동 흔적들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점점 더 과거와 현재, 민족사와 개인사를 가로질러 확장된다. 관 속에 잠들어 있던 존재는 더 이상 단순한 원혼이 아니다. 전쟁과 식민지의 폭력, 쇠말뚝 신앙과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뒤엉킨 '일본식 요괴', 오니에 가깝다. 밤이 되면 이 존재가 봉인을 부수고 뛰쳐나와, 축사와 마을을 유린하는 장면들은 괴수 영화와 민속 공포가 만나는 지점에 서 있다. 마치 고질라가 갑자기 전라도 산골에 나타나는 것 같은 기묘한 장르 혼종.

이 과정에서 상덕, 영근, 화림, 봉길의 조합은 일종의 '한국형 고스트버스터즈'로 자리 잡는다. 양성자 빔 대신 굿과 경문을, 트랩 대신 풍수와 장례 의식을, 파이어하우스 본부 대신 승합차 안에서의 회의를 보여주는. 기도와 술법이 한데 섞여, 오니와 맞서는 마지막 의식으로 향하는 길. 화림과 봉길의 몸에 새겨진 경문 문신, 승탑 앞에서 불붙는 오니의 육신, 도깨비불처럼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거대한 불덩이까지. 영화는 여기서 공포와 스펙터클의 정점을 찍는다. 다만 그 결과로 네 사람이 무엇을 잃고 얻는지는, 직접 극장에서 확인하는 편이 좋다. 결말부의 몇 장면은 작품 전체의 의미를 다시 정리해 버리는 힘을 갖고 있어서, 말로 미리 풀어 버리면 스포일러 경찰이 출동할 정도로 확실히 힘이 빠진다.

오컬트 3부작의 완성, ‘천만’의 기적

장재현 감독이 세 편의 오컬트 연작 끝에 종착역에 도달한 것 같은 완성도다. '검은 사제들'이 가톨릭 구마 의식으로 서구 호러의 문법을 한국화했고, '사바하'가 신흥종교와 불교 신화를 베이스로 철학적 질문을 던졌다면, '파묘'는 철저히 한국인의 무속, 풍수, 묘 문화를 전면에 내세운다. 덕분에 장르는 오컬트인데도, 관객이 느끼는 거리감은 훨씬 가깝다. "어디 친척 장례식에서 한 번쯤 들었을 법한 말들"과 "뉴스에서 지나가듯 봤던 친일파 후손, 명당 이야기"가 그대로 영화 안으로 들어온 느낌이다. 마치 할머니 댁 장롱 속에서 발견한 낡은 사진첩처럼, 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장르적으로 보면, 이 영화는 공포 영화라기보다 오컬트 어드벤처에 가깝다. 진짜 섬뜩한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하지만, 전반적인 톤은 무서움보다는 긴장과 호기심, 때때로 터지는 웃음에 더 가깝다. 영근이 장로 신분으로 굿판에서 어색하게 앉아 있는 모습(마치 채식주의자가 고깃집에 끌려온 것처럼), 상덕과 영근이 의뢰비를 두고 티격태격하는 장면(회계사가 아니라 퇴마사들이 엑셀로 정산하는 느낌), 화림과 봉길이 반쯤은 '영업사원' 같고 반쯤은 '사제 관계' 같은 묘한 케미를 보여주는 순간들이 그렇다. 이 일상의 유머가 있어야만, 그 뒤에 따라오는 공포가 더 명확하게 대비된다. 코미디와 호러의 스위칭이 마치 댄스 게임의 스텝 체인지처럼 정교하다.

네 배우의 앙상블은 이 영화의 가장 큰 힘이다. 김상덕을 연기한 최민식은, 노련한 풍수사라는 캐릭터에 잔정과 고집, 시대의 죄책감까지 쿨하게 섞어 넣는다. 땅을 한 줌 집어 먹으며 "이 땅이 어떤 꼴을 당한 건지 알겠다"는 식으로 중얼거릴 때, 단순한 직업인 이상의 무게가 느껴진다. 마치 와인 전문가가 한 모금 마시고 "이 포도밭은 2차 세계대전 때 폭격을 맞았군"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 소름. 유해진의 고영근은 현실 감각 200퍼센트인 장의사다. 돈을 밝히고, 위험 앞에서는 몸 사리면서도, 마지막 순간에는 무심한 척 몸을 던지는 인물. 무속과 장례라는 무거운 소재를 관객에게 부담 없이 전달하는 역할을 도맡는다. 마치 공포영화 속 코믹 릴리프가 아니라, 진짜 우리 동네 장례식장 사장님처럼.

김고은의 이화림은 이 영화의 가장 선명한 얼굴이다. 화려한 패딩과 후드를 걸친 젊은 무당이라는 설정부터가 이미 새롭다. 전통 한복이 아니라 노스페이스를 입고 굿을 하는 무당. 굿판에서도 욕을 섞어 가며 솔직하게 말하고, 의뢰비를 두고 기분 나쁘면 바로 나가버리려 할 만큼 당차다. 하지만 오니와 마주한 뒤, 봉길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무너지는 장면에서는 다른 얼굴이 나온다. 헛웃음과 눈물, 공포와 책임감이 한꺼번에 올라오는 복합적인 표정이 이 캐릭터를 단순한 '걸크러시 무당'으로 소비되지 않게 한다. 윤봉길 역의 이도현은 순박함과 얕은 겁, 그리고 스승을 향한 충성심을 동시에 가진 제자의 얼굴을 섬세하게 잡아낸다. 몸을 날리는 장면에서도, 빙의된 채 일본어를 토해내는 장면에서도, 그는 늘 인간적인 약자에 가깝다. 마치 반지의 제왕에서 프로도가 절대반지를 지고 가듯, 무당계의 막내가 모든 공포를 온몸으로 흡수하는. 그 약함 덕분에 클라이맥스의 희생과 선택이 더 크게 다가온다.

1,191만 명이 본 오컬트, 장르의 혁명

'파묘'가 흥행 면에서 기록적인 성과를 거둔 것도 주목할 만하다. 2024년 2월 개봉 후 입소문을 타고 관객을 끌어모으더니, 개봉 32일 만에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며 그해 첫 천만 영화가 됐다. 역대 32번째, 한국 영화로는 23번째 천만 영화이자, 전통적인 의미의 오컬트·호러 장르로는 최초의 기록이다. 최종적으로는 약 1,191만 관객, 매출액 1,100억 원대라는 숫자를 찍으며 상반기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장르적 한계를 뚫고 중년 관객까지 극장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한국 상업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셈이다. 마치 인디 밴드가 갑자기 멜론 차트 1위를 찍은 것 같은 기적.

연출의 디테일을 보면, 장재현 감독이 왜 '오컬트 장인'이라는 별칭을 얻었는지 이해가 간다. 차 번호판 숫자에 광복절(0815)과 삼일절(0301)을 숨겨 두고, 주요 인물들의 이름을 실제 독립운동가 이름에서 가져오는 식의 장난스러운 코드가 곳곳에 박혀 있다. 이건 단순한 Easter Egg가 아니라,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친일 잔재 청산'이라는 정서를 시각적·언어적 층위에 동시에 새겨 넣는 작업이다. 마치 레디 플레이어 원처럼 숨은 그림 찾기가 가능한 영화. 일본이 박아둔 쇠말뚝을 뽑고, 우리 땅의 기운을 되살린다는 상징은 오니와의 싸움을 단순 괴수퇴치가 아니라 역사적·정서적 복수로 확장시킨다. 퇴마가 곧 독립운동이 되는 영화적 연금술.

완벽하지 않기에 더 흥미로운

물론 이 과감한 시도가 모두에게 완벽하게 먹히는 것은 아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일본 요괴와 독립운동 상징, 백두대간과 숫자 암호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면서 과잉감이 느껴진다는 반응도 적지 않았다. 특히 오니와의 최종 대결은 스펙터클한 만큼, 전반부가 쌓아온 소소한 공포와 생활감 넘치는 리얼리티와 결이 달라 보인다. 마치 동네 귀신 이야기를 듣다가 갑자기 어벤져스 엔드게임 최종전이 펼쳐지는 느낌. 공포의 결말을 역사적 의미로 정리하려는 욕심이, 약간은 설명적이고 무겁게 느껴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논쟁 지점은 바로 '무속 사용의 방식'이다. 이 영화는 분명 무속을 귀신을 다루는 기술이자 한국 고유의 정신문화로 긍정적으로 그린다. 동시에, 상업적이고 장사꾼 같은 무당들의 면모도 숨기지 않는다. 그 균형 덕분에 무속이 신비로운 판타지가 아니라, 이 땅의 한 직업으로 보이기도 한다. 마치 닥터 스트레인지가 마법사면서도 의사 출신이라 청구서를 챙기는 것처럼. 다만, 무속 자체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관객이라면, 굿 장면과 빙의 장면이 반복되는 이 영화의 세계관이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다.

한국 장르영화의 현재를 확인하고 싶은 관객이라면 '파묘'는 일종의 필수 과목 같은 작품이다. 오컬트와 미스터리, 역사 코드와 상업성이 어떻게 한 편 안에서 공존할 수 있는지, 그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검은 사제들'과 '사바하'를 이미 좋아했던 관객이라면, 이 세 번째 작품에서 장재현 감독이 어떻게 전작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보완하려 했는지도 흥미롭게 느낄 것이다. 마치 마블 페이즈 3를 보며 페이즈 1부터의 떡밥 회수를 즐기는 것처럼.

둘째, 공포 장르에 입문하고 싶은데 정통 호러는 아직 부담스러운 사람에게도 적당하다. 물론 잔상 남는 장면이 몇 개 있지만, 영화 전체가 공포에만 올인하지는 않는다. 네 인물의 케미, 풍수와 장례의 세계, 역사적 상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러닝타임이 끝나 있는 타입에 가깝다. "너무 무서운 건 싫은데, 그냥 가볍기만 한 영화도 싫다"는 관객에게 특히 잘 맞는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고 싶은데 자이로드롭은 무서워하는 사람에게 딱 맞는 놀이기구처럼.

마지막으로, 우리 땅과 역사, 조상과 후손의 관계를 장르영화 틀 안에서 다시 바라보고 싶은 이들에게 '파묘'를 권하고 싶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묘지 옆을 지날 때나 산길을 걸을 때, 혹은 오래된 절을 찾았을 때 풍경이 조금 다르게 보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밟고 선 땅 아래에 무엇이 박혀 있고, 어떤 기억이 묻혀 있는지 한 번쯤 떠올려 보게 만든다. 그 질문이야말로 '파묘'가 귀신보다 더 오래 남기는 진짜 여운일 것이다. 마치 고고학자가 유적지를 발굴하듯,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잊혀진 역사의 층위를 파내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건, 어쩌면 귀신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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